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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만화가 Nov 16. 2024

[단편소설] 비대칭의 대칭성

**

땅이 울릴 정도로 큰 파열음이 들린다. 나는 화장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실험실로 뛰어가 문을 열어젖힌다. 실험실 중간에 있는 용매 정제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다들 상기된 표정이다. <괜찮아 괜찮아> 누군가가 말한다. 괜찮다는 건, 다친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일단은 오케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순간 아차 싶지만, 학생들은 이미 뒤를 돌아본 뒤다.

<다친 사람은 없나요?>

내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흠칫 놀란다. 하지만 모두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릴 뿐, 아무도 또렷이 대답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파도에 모래성이 흩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빠르게, 모여있던 자리에서 흩어진다.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 사이로 푸른색 파편들이 드러난다.

용매 정제기에 딸려 있던 2L짜리 듀워 플라스크가 산산조각 나있다. 그리고 그 주위를 플라스크에서 쏟아진 드라이아이스의 회색 연기가 감싸고 있다. 공습을 받은 드레스덴의 미니어처 모형 같다.

잔해 옆에 서 있는 이는 우 박사다. 그는 양손에 파란색 저온 장갑을 끼고 있다. 큰 키와 마른 체형 때문에 마치 장갑이 기다란 의류용 행어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는 넋이 나가 있다. 입을 벌린 채, 초점이 없는 눈으로 스테인리스 파편 위에서 승화되고 있는 드라이아이스를 바라본다.

나는 왼손을 우박사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뻗은 다음 딱, 딱 튕긴다. 우 박사는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청각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은 것 같다. 강하게 진공이 잡혀 있는 듀워 플라스크가 깨질 때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보다 더 큰 소리가 난다. 운이 없으면 고막에 손상을 입는다.

<뭐, 종종 있는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의식적으로 가벼운 톤으로 말한다. 하지만 말 끝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것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나 스스로에게도 내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린다. 우 박사는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면목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실험실 출입구 쪽에 놓인 청소도구를 가져와서는, 허겁지겁 잔해를 쓸어 담기 시작한다. 각자의 실험 후드로 돌아간 학생들이 보안경 너머로 그를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그가 청소를 끝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노란색 비품용 캐비닛에서 새 듀워 플라스크를 꺼내 우 박사에게 건넨다.

<놀랐을 텐데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우 박사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의 영어에는 중국인 특유의 얼 발음이 강하게 섞여 있기 때문에, 바짝 집중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같은 동아시아인인데, 유럽이나 남미 사람들의 영어보다 그의 영어가 알아듣기 힘들다는 점은 언제나 미스터리다.

우 박사는 새로운 듀워 플라스크를 들고 드라이아이스 박스로 가서는, 나무망치로 깬 드라이아이스를 플라스크 안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 위에 아세톤을 뿌린다. 치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냉각된 아세톤이 이산화탄소 연기를 타고 밖으로 튀어 오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만다. 우 박사는 멍한 얼굴로 듀워 플라스크를 집어 들고는 용매 정제기로 걸어간다. 이제는 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우 박사를 바라보고 있다. 우 박사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듀워 플라스크에 안전장치를 체결하고는 진공펌프를 켠다. 행동에 거침이 없다. 진공펌프 모터 소리가 실험실을 채운다.

이제 학생들의 눈은 내게로 향한다. 나는 우 박사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있지만,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갑자기 화가 치민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외칠 수는 없다.

<실험 조심하고, 시약 구매해야 할 것 있으면 퇴근 전까지 메신저로 말해주세요.>

하나마나한 말을 남기고 실험실을 빠져나온다. 학생들의 시선이 내 뒷목에 머무는 것이 느껴진다.

에어컨이 돌지 않는 이학관 빌딩 복도는 후텁지근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더 뜨겁게 데운다. 그래도 실험실 안에 있을 때보다는 몸이 가볍다. 학생들을 대할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힘이 들어간다.

머리가 욱신 거리기 시작한다. 혈관 안에서 굼벵이가 꿈틀대는 것 같다. 미뤄두었던 논문 투고용 커버레터 작성을 오늘은 꼭 마무리하자고 결심했었지만,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서 시원한 침대에 그대로 뻗고 싶은 생각뿐이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잊은 채 조교실로 돌아온다. 불이 꺼져 있다. 이미 아홉 시를 넘은 시간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제로 콜라 한 캔을 꺼내 들고는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콜라캔을 눈 위에 갖다 대고 문지른다.

문이 열린다. 데이빗이 조교실로 들어온다. 글러브 박스를 쓰다 왔는지 상반신이 온통 땀 투성이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타고 시큼한 냄새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저기… 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저기 의자 아무 거나 꺼내서 앉아요.>

나는 냉장고에서 콜라를 하나 더 꺼내 그에게 건넨다. 무슨 이야기일지 짐작이 간다. 머리가 더욱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데이빗은 캔을 받아 들고 의자에 앉는다. 쉽게 입을 떼지 못한다. 분명 여기 온 것도 본인의 의지는 아닐 터였다. 그는 땀에 젖은 두 손으로 콜라캔을 빙글빙글 돌리며 뜸을 들인다.

<지내는 건 어때요? 실험실이 너무 덥지는 않나요?>

참지 못하고 내가 묻는다.

<고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어컨도 있고요.>

데이빗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는 3년 차 대학원생이다. 국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베를린행 비행기에 탈 때까지 한 번도 나이지리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데이빗은 가족이나 고향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나이지리아에 대해 물으면 소년 같은 미소를 짓는다.

<할 말이라는 게 뭔가요?>

내가 다시 묻는다. 데이빗의 표정이 굳는다.

<우 박사에… 대한 거예요. 학생대표로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데이빗은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고는, 손바닥을 내게 펴 보인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나는 이해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데이빗은 내성적이고, 갈등을 힘들어한다. 랩미팅 때 신경질적인 질문이 들어오면 몸이 굳어 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학생대표 역할을 얼마나 부담스러워할지 알고 있다.

<벌써 세 번째예요.>

<뭐가요?>

나는 답을 알면서 되묻는다.

<듀워 플라스크를 깨뜨린 거요.>

<실험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절차를 지키다가 그런 거면 저희도 이해를 해요. 하지만… 아까도 보셨잖아요? 듀워 플라스크를 들고 이동하지 말라고 저희가 몇 번이고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들은 채도 하지 않는다구요.>

데이빗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짜증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이 느껴진다.

<지난번에 터뜨렸을 때는 안나가 리티에이션 (Lithiation) 반응을 하는 중이었어요. 깨지는 소리에 놀라 시린지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시약이 옆에 있던 학부생 인턴에게 튈 뻔했어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

데이빗은 쉬지 않고 말을 내뱉고는 콜라캔을 따서 맥주처럼 들이켠다. 내가 그 사건을 알고 있다는 것을 데이빗이 모를 리 없다. 그 일로 학생부에 몇 번이고 불려 갔었다. 나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그를 지켜본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걸 거예요. 내가 다시 한번 주의를 줄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보며 내가 이야기한다.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다들, 킴이 우 박사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해요. 방금 전에 두 요… 신입생들은 이 일을 머킨 교수님께 바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제가 겨우 뜯어말렸어요.>

머킨 교수의 이름이 들리자 가슴 끝자락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든다.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목구멍에 모래가 낀 것 같다. 억지로 성대를 틔워 목소리를 낸다.

<잘 알았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려 애쓴다. 볼 끝이 떨리면서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데이빗은 말없이,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좋은 밤이 되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조교실을 떠난다.

나는 미지근해진 콜라캔을 냉장고에 다시 집어넣는다. 그냥 냉장고 속에 얼굴을 집어넣고 싶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대로 냉장고가 폭발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팽창할 냉각가스에 두개골이 플라스틱 공처럼 터져버리는 상상을 하자, 그나마 마음이 가라앉는다.

컴퓨터 전원을 끈다. 핸드폰과 지갑을 크로스백에 쑤셔 넣는다. 가방 안에는 채 읽지 못한 논문다발이 가득하다. 냉장고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조교실을 나선다. 열기만 남아있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간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비로소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화학과 대학원이 있는 L동은 대학 캠퍼스 안을 가로지르는 작은 실개천에 휘감겨 있다. 건물은 반으로 자른 원기둥 형태를 하고 있고, 그 곡면을 따라 물이 흐른다. 단면 쪽 너머로는 차도로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이 펼쳐져있다. 봄이면 들꽃이 언덕을 뒤덮는다. 학생들은 창문 너머로 흘금거리는 교수들의 의뭉스러운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돗자리를 펴 두고 햇볕을 즐기곤 한다.

기숙사로 가기 위해서는 개천 위로 걸쳐진 돌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나는 다리를 지나친다. 그리고 건물의 외벽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독일어 팟캐스트를 듣는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생각이 여기저기로 튀기 시작한다.

열 시를 가리키는 알림이 울린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보이스톡 버튼을 누른다. 신호가 가기 시작한다. 독일 앱에서는 들을 수 없는 경쾌한 음악이다. 초조해서 걸음이 빨라진다.

음악이 계속된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의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쓴다. 음악이 끊기고, 통화 시도가 종료되었다는 효과음이 울리자 어깨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위로 솟아오른다. 조바심이 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1분만 기다렸다 다시 전화를 걸자고 마음먹는다. 건물 모퉁이를 돌고 핸드폰을 본다. 그냥 다시 보이스톡 버튼을 누른다.

선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이 잠겨 있다. 잘 잤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한다. 짧은 대화와 긴 침묵이 반복된다. 항상 전화를 걸고 나면, 전화를 건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날씨 이야기를 한다.

<서울은 늦은 장마야. 계속 비가 오네.>

나는 우산을 챙기라고 말한다. 선희가 알겠다고 대답한다. 다시 정적이 이어진다.

통화는 엉성하게 끝난다. 선희는 출근 준비를 해야 하고, 나는 오늘 결코 쓰지 않을 것이 분명한 커버레터를 쓰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 선희가 먼저 전화를 끊는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스마트폰 화면을 티셔츠로 쓱쓱 닦은 다음 가방에 집어넣는다.

마지막으로 결혼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지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일은 꼭 다시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전화를 걸기 전 보다 기분이 한층 더 침울해진다.

**

<파라(para) 활성화 쪽은 확실히 도전적인 것 같네요.>

머킨 교수가 머그컵에 커피를 따르며 말한다. 그는 지역 파티에서 얻어온 레버쿠젠 저지를 입고 있다. 헝클어진 금발 머리에서 옅은 포마드 냄새가 난다.

<어렵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반응 조건이 셋업 되었으니 빠르게 스크리닝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대답한다.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는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커피에 벌레라도 들어있는 것 마냥 미간을 찡그리고 머그컵 안을 응시한다. 머킨 교수에게 ‘도전적’이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꼭 촉매 반응만 고집할 필요는 없어요. 당량 반응도 가설을 증명한다는 면에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요.>

<말씀해 주신 방향으로 우 박사와 의논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량 반응일 경우 결코 머킨 교수가 논문 투고를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우 박사는 좀 어때요?>

어떠냐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잠시 생각한다.

<잘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킴이 잘 도와줘요. 우 박사에게는 기대가 커요. 어찌 되었건 킴의 픽(pick) 이니까요.>

우 박사를 뽑자는 의견을 낸 것은 나였다. 어째서였을까. 지금은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다. 침묵의 뜻을 머킨 교수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여전히 찌푸린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일 뿐이다. 그는 마치 내가 사무실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나가보겠다고 하자, 그제야 내 존재를 인지한 것처럼 입을 한 번 오므렸다 펴고는 ‘Have a nice day’라고 영어로 인사를 건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참. 저녁에 시간 되죠? BASF에서 사람들이 올 거예요. 간단하게 랩 투어 좀 해줘요. 내가 킴 이야기를 해 두었어요. 최초로 ‘카이메노파이신’을 합성한 사람이라고요.>

나는 머킨 교수에게 걱정 말라고 말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져 있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다. 우 박사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짐작을 했지만, ‘카이메노파이신’ 이 언급될 것 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기분이 엉망진창이 된다.

실험실 도어록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직 오전 7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다. 머킨 교수는 언제나 아침 일찍 오피스에 들린다. 그리고 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독일인 아내와 두 아들과 오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교수 아파트로 돌아간다. 보통은 나도 기숙사로 되돌아가서는 밀린 빨래를 하거나, 지원서를 손본다. 하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다. 나는 실험실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글러브 박스의 산소 레벨을 체크하면서, 우 박사를 기다린다.

일곱 시 반을 조금 지났을 무렵, 우 박사가 실험실로 들어온다. 몸에 맞지 않게 큰 티셔츠에 카고 바지 차림이다. 손에는 투명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안에는 음식이 담긴 락앤락 통이 들어 있다. 그는 땅을 바라보고 걷는다. 그러다 자기 책상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러지 마세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잖아요.>

농담으로 건넨 말이지만 우 박사는 웃지 않는다. 그는 마치 도로 한가운데 박혀 있는 거대한 돌을 발견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점심식사예요?>

나는 우 박사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가리키며 묻는다. 우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닐봉지에서 도시락 통을 꺼낸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바닥에 버리고는, 락앤락 통을 열어 보인다.  초록색 빛이 감도는 물만두가 들어 있다. 방금 냉동실에서 꺼냈는지 위에 살얼음이 끼여 있다.

<아내가 보내준 거예요. 버섯 만두죠. 지린성 전통 방식으로 빚었어요. 킴도 좀 먹어 보세요.>

나는 최대한의 성의를 담아 그의 물만두를 내려다본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정말로 손으로 빚었는지 만두 끝자락이 잘린 끝자락이 투박하다.

<귀한 음식이네요! 고맙지만, 전 괜찮아요.>

우 박사는 두 번 권하지 않고 재빨리 뚜껑을 닫은 뒤, 비닐봉지를 주워 통을 도로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다시 도로에서 발견한 돌을 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본다.

<아침에 머킨 교수랑 디스커션을 했어요.>

나는 그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며 말한다. 내 입에서 머킨 교수란 단어가 나오자 그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반짝인다.

<뭐라고 하던가요? 실험은 빨리 진행할 수 있어요. 하루에 스무 개… 아니, 적어도 스물 다섯 세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원한다면 이번 주말까지 스크리닝을 끝낼…>

<좋아요… 좋아요.>

나는 그의 말을 끊는다.

<스크리닝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구는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아요. 머킨 교수도 전체적인 플롯만 괜찮다면, 꼭 촉매반응이 아니더라도 논문 내는 걸 검토해 줄 거예요.>

우 박사는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어깨를 늘어뜨린 다음 내 표정을 살핀다.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우 박사는 왼손으로 짧게 자른 머리를 긁으며 머리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이건 촉매 반응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어요. 킴도 알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내 행동이 우 박사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 박사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연구는 꼭 Organic Letters 이상은 내고 싶어요. 그래야 모교로 돌아갈 수 있어요.>

우 박사는 말을 끝내고는 책상 위에 비닐봉지를 내려놓는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보지 않는다. 그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 모니터에 코가 닿을 것처럼 목을 앞으로 숙이고는, 밤 사이에 저널 홈페이지에 뜬 논문들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

오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몇 가지 잡무 - 새로 설치될 후드 설계의 확정. 몇몇 학생들의 비자 갱신을 위한 추천서 작성. 오배송된 시약의 폐기 - 를 마치고 회의에 참석한다. 실험실 별 환경안전검사 일정을 조율하기 위한 회의다. 나는 머킨 교수 연구실의 환경 안전 담당자이자 랩 매니저 자격으로 참석한다.

내 박사 후 연구과정 펀딩이 종료되었을 때, 머킨 교수는 내게 랩 매니저 직을 제안했다. 조금 더 나은 월급과 연구 자율성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독일에서 킴과 나는 둘 다 아웃사이더예요. 우리끼리 호흡이 잘 맞아야 해요.>

내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내가 본인과 손발이 잘 맞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늦게 까지 실험을 진행하다 선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건물 5층에 있는 테라스로 나갔다.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보았다.

<킴은 힘들어. 아마 그는 10년 전부터 한계였을 거야. 그는 그저 운이 알맞게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

머킨 교수가 동료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그렇게 계속 학위 과정을 버텨왔는지 모르겠어. 한계가 명확한 상황에서 말이야.>

나는 랩 매니저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정말, 선택지가 없었다.

회의는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어느 랩이 먼저 검사를 받을 것이냐는 걸로 의견 충돌이 생긴다. 날카로운 말들이 오간다. 결국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생화학과 교수의 실험실이 첫 검사 대상으로 정해진다. 나는 공식적으로 회의가 종료되기 전에,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

조교실로 돌아온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식사거리를 챙겨서 나가는 이들이 내게 같이 나갈 거냐고 묻는다.

<아니요. 할 것 조금만 하고 따로 먹을게요. 샌드위치를 가져왔거든요.>

그들은 알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그들이 모두 나가는 걸 기다렸다가 모니터를 켠다. 밥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차피 가지고 온 것도 없다. 언제부턴가 작은 거짓말로 상황을 벗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여전히 편의를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서 무언가가 깎여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컴퓨터로 메일함을 확인한다. 머킨 교수의 메일이 와 있다. 그가 담당하는 여름 학기용 ‘유기 합성 세미나’ 과목의 마지막 시간을, 내가 진행하라는 내용이다.

‘카이메노파이신 비대칭 합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메일 끝부분에, 세미나 준비를 우 박사와 함께 하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

거울상 비대칭 합성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부분적인 대칭성을 가진 촉매가 필요하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자연의 신비다. 점대칭 촉매는 한쪽 방향으로 감기는 회오리와 같다. 그 속으로 찰흙을 던져 넣으면, 찰흙 덩어리는 매끈한 모양의 오른손 (혹은 왼손)으로 변화된 채 밖으로 튕겨 나온다.

카이메노파이신은 오랜 기간 동안 RG183760-L로 불렸던 물질이다. 인간에게 불필요한 자연물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카이메노파이신은 코드명을 받은 바로 그 순간부터 잊혀 가기 시작했다. 특별한 생리 활성도, 공업적 활용도도 없었기 때문에, 카이메노파이신은 오랜 기간 동안 그저 낡고 녹슨 (그렇지만 길고 두꺼운) 해양 천연물 카탈로그의 한 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복잡한 유기물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몇 안 되는 천연물 합성 과학자들 밖에 없었다. 천연물 과학자들은 위대한 형사들이 세기의 대도를 기다리듯, 복잡하지만 매력적인 분자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중 몇 명이 RG183760-L의 분자 구조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카이메노파이신 속에 숨어있는 아슬아슬한 거울상의 균형에 소수의 사람들이 매혹된 것이다. ‘카이메노파이신’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뉴질랜드 출신의 그는, 이제는 고루한 기법이 되어 버린 고전적인 엑스선 결정법을 사용하여 최초의 카이메노파이신 결정을 만들었고, 멋들어진 이름을 선물했다. 카이멘은 RG183760-L이 처음 발견된 산호초 군락의 별명이다.

<킴. 꼭 내가 15분을 할 필요는 없는 거죠?>

노트북 키보드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던 우 박사가 내게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시선을 모니터 위에 떠 있는 화학 구조 설계 프로그램에 고정시킨 채 손가락을 움직인다. 못 들은 것으로 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킴. 킴. 킴?>

우 박사가 나를 재차 부른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쉰 다음, 의자를 돌려 우 박사를 마주 본다. 그는 원탁 위에 본인의 개인 노트북을 올려둔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짜증이 가득 섞인 표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다. 조교실에는 나와 우 박사밖에 없다.

<꼭 시간을 채울 필요는 없지만, 논문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는 것만 해도 15분은 족히 되지 않을까요?>

나는 악센트를 배제한 영어로 말한다.

<그렇지만… 이 건 정말 시간 낭비인 것 같아요. 우리는 실험을 하고, 논문을 써야 돼요. 킴,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기예요.>

우 박사는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툴툴 거린다. 나는 대꾸 없이 다시 내 발표자료로 고개를 돌린다.

<킴. 함부르크에는 누가 갈 것 같아요?>

우 박사가 다시 내게 말을 건다.

<제 생각에는 틀림없이 샤하일 거예요. 분명히 그 애 아버지도 올 테니까요. 뭐, 최근에 쓴 논문도 네이처 켐에 나갔으니, 아무도 이견은 없을 테죠.>

나는 머킨 교수가 나에게 마지막 세미나를 부탁한 이유가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학회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머킨 교수는 작지만 단단한 학회, 그러니까 학계의 무도회 같은 느낌의 학회에 참석할 때면 총애하는 랩원을 한 명씩 데려간다. 샤하 레비는 이스라엘에서 온 열정 많은 여학생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유기금속촉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테크니온의 레비 교수다.

카이메노파이신 비대칭 합성 세미나에 대한 우 박사의 열의는, 머킨 교수가 세미나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급속도로 식어갔다. 처음 나와 함께 세미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냈던 아이디어들은, 그 자신에 의해 거부되었다. 결국 우리는 세미나의 전반부를 15분씩 나누어 담당하고, 뒤의 30분 동안 질문을 받는 것으로 결정하고 말았다. 대학원 세미나로 적합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 그와 부딪히며 협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 박사는 발표의 우선권을 주장했다. 나와 우 박사는 모두 카이메노파이신의 비대칭 합성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가 카이메노파이신 거울상 합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정확히 1년 뒤, 우 박사가 두 번째 비대칭 합성 루트를 개척했다. 둘의 합성 전략이 다르기는 하지만, 다루는 물질이 같은 만큼 내용이 겹칠 수밖에 없다. 먼저 발표를 하는 사람이 더 큰 자유를 가진다. 마치 동일한 물감통에서 두 사람이 물감을 꺼내 쓰는 것과 같다. 앞선 사람이 물감을 다 가져가 버리면, 뒷사람은 남은 흑백 물감으로 풍경화를 그려야 한다.

나는 우박사를 남겨두고 조교실을 나선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복도를 거닐며 핸드폰을 확인한다. 오래된 게임 앱, 이제는 광고만 올라오는 SNS, 그리고 평범한 데이터만 쌓여가는 헬스 앱을 열었다 닫는다 그러다 총을 꺼내 드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구글 메일함 아이콘을 클릭한다. 잡 어플라이 용으로 새로 만든 구글 계정이 열린다. 수신 메일함은 비어있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지만, 한국도 주말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메신저 앱을 다시 연다. 선희는 내가 어제 자기 전 보낸 메시지를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다시 조교실로 들어온다. 모니터에 발표자료를 그대로 띄워 두고 나온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우 박사는 내 컴퓨터가 그 공간에 없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본인의 마우스만 두드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의 모니터를 본다. (우연히 보게 된다. 아니, 본다.) 우 박사는 파워 포인트 자료의 첫 페이지를 만들고 있다. 검은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2015년부터 조금씩 발견되기 시작한 카이메노파이신의 전립선암 치료 효과에 대한 내용들이다.

<인트로 부분에서는 분자 구조를 좀 더 보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도 모르게 말이 나오고 만다.

<괜찮아요. 이 쪽이 더 중요해요.>

우 박사는 나를 보지 않고 대답한다.

순간, 나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화가 솟구친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책상을 내려치지 않기 위해 등과 팔에 잔뜩 힘을 준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탈피를 하는 나방처럼, 뒷목부터 시작해서 살껍질이 벗겨지는 기분이다. 우 박사는 여전히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아주 천천히 내 자리로 걸어간다. 우 박사 쪽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눈을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의자에 앉고 나서야 내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을 펴기가 힘들 정도다. 중지 손톱이 닿아 있던 손바닥에 핏방울이 맺힌다.

<킴. 나는 먼저 돌아갈게요. 오늘 딸 생일이라서 영상 통화를 해야 해요. 자료는 거의 완성되었으니, 저녁 전까지는 메일로 보내 놓을게요.>

해가 질 때쯤, 우 박사는 짐을 챙겨 본인의 기숙사로 돌아간다. 나는 인사를 건네는 그를 뒤에 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을 흔들어 보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낮 동안 만들었던 발표 슬라이드를 모두 지운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 위해 저장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새 슬라이드를 한 장 만든 다음, 화면이 가득 차도록 카이메노파이신의 분자 구조를 그리기 시작한다.

흰 화면 위에, 마치 가로로 누운 무한대 표시를 연상시키는 카이메노파이신의 분자구조가 떠 있다. 나는 신중하게 화학 구조식의 서식을 고른다. 기본 서식을 ‘ACS 1996’으로 설정한 뒤, 원소 기호의 크기, 탄소와 탄소를 잇는 선의 길이, 그리고 이중 결합 선의 굵기를 미세하게 조절한다. 실제와 비슷한 3차원 구조를 가지면서, 보기에도 좋은 화학 구조를 그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수정을 반복한다. 화학 구조를 그리는 건 언제나 어렵다. 분명 수 백 번은 그린 구조식이지만, 매번 발표자료에 삽입할 때마다 단점이 보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거대한 합판 위에 올려진 톱니바퀴들이 저마다의 이를 물고 돌아가듯이, 자연스럽게 구조가 맞추어지기 시작한다. 마우스 움직임이 빨라진다. 단숨에 카이메노파이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

세미나가 시작하기 10분 전이지만, 우 박사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계절학기를 듣는 학생들은 저마다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계절학기의 마지막 수업이어서 인지 다들 조금은 흥분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각자의 언어로 옆에 앉은 이들과 이야기한다. 그러다 웃는다. 나는 세미나실 앞에 있는 입식 책상에 서서, 우 박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조교님. 머킨 교수님은 안 오시나요?>

누군가 내게 질문한다. 고개를 든다. 누가 질문했는지 알 수 없다. 어느샌가 다들 나를 보고 있다.

<학회 참석으로, 오늘은 오시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 보냈던 공지 메일에 썼던 문장을 독일어로 반복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나는 그들이 휘파람을 불거나, 환호성을 내뱉으며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웃지 않는다. 그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몇몇 학생들은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든다. 나는 조금 놀란다. 다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준비해 둔 자료를 강의용 TV 화면에 띄운다. 흰 바탕 위에 카이메노파이신 구조식이 떠오른다. 그리고 느린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나는 애니메이션이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강의실 쪽을 바라본다. 이제 그들의 눈은 화면 위에서 돌아가는 화학구조에 고정되어 있다.

핸드폰이 울린다. 우 박사다. 나는 메시지 앱을 연다.

‘함부르크에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세미나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짧은 메시지다. 추가적인 설명은 없다. 나는 메시지 옆에 있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본다. 직접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활짝 웃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옆에는 그를 쏙 빼닮은 소녀가 우 박사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나는 핸드폰을 끈다. 세미나실 안은 고요하다. 나쁘지 않은 적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작하나요?>

누군가 묻는다. 이번에는 몇몇 학생들이 낮고 짧은 웃음을 터뜨린다. 나도 미소를 짓는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나는 길게 숨을 한 번 내쉰다. 그리고 단상 위에 걸린 시계를 본다.

나는 레이저 포인터의 버튼을 누른다. 화면 위에 초록색 점이 생긴다. 나는 레이저 포인터를 돌려, 카이메노파이신의 중심에 있는 벤젠 구조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아름다운 분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세미나를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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