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21년 현재 정보통신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로봇,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사회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일을 하는 그저 평범한 통신분야 직장인 눈으로서 우리 시대를 되돌아본다.
사실 내가 태어난 해에는 세계가 68 혁명이라는 큰 파동을 거치면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각성을 이루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강력한 전체주의 정권이 자리 잡고 있었고 눈과 귀가모두 막힌 채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달려만 가던 시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서구의 민주주의를 수입하면서도 본질적인 철학 흐름에 대하여 교육과정에도 심지어 발간된 책에서 조차 거세된 채 단편적인 정보만 습득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이 프랑스혁명과 연관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고, 세계적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속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그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또한, 배우던 역사 교과서 속에서 동학혁명은 동학의 난이었고 농민을 진압하는 입장에서 기술되어온 역사를 배웠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국사회 역시 여타의 식민지 겪은 나라들처럼 과거 식민지 권력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100년 전 일제 강점기를 거쳐서 형성된 친일 기득권 권력은 청산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어왔다.
오늘날 한국의 사학 형성은 이승만 정권 농지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농지개혁을 면하는 조건으로 학교 설립을 장려했고 자신들의 땅 수용을 원하지 않는 친일 기득권들은 학교를 만들어서 농지개혁을 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 사학재단 등 교육 기득권의 형성과 역사적 청산 없이 면죄부를 통해 오히려 미래세대에게 교육 과정을 통해 친일 사관을 주입할 수 있는 기회를 독점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입된 인식의 틀을 깨트린 것은 정보통신의 발전에서 비롯되었다. 정보통신은 정보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간 소통을 수평적으로 하게 만들었다. 그런 소통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네트워크와 연결된 집단지성체인 깨어있는 시민이 탄생하게 되었다.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집단 지성체는 인간의 상식을 기반으로 스스로 조직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질문과 경험 공유가 네트워크상에서 모이면서 스스로 진화해 나간다. 집단 지성체로서 우리는 우리가 정규 교육과정에서의 배우지 못한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특히 우리 교육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 두 명의 인물 베버른과 조지 오웰의 시각으로 이 시대를 보려고 한다.
베버른이 바라 온 한국사회 기득권층과 추종자들
베버른은 1857년 미국 태생의 사회학자로서 그의 저서에서 여유로운 기득권층인 (유한계급)의 특성을 진화생물학 관점에서 그 특성을 연구했다. 반면 한국사회 현실을 보면 여전히 베버른이 연구한 것처럼 여유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움이 되는 방향을 추구하지 못하고 기득권 질서를 옹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국회의원 자식의 특채 입사 및 음주운전, 폭력에도 관대한 사법과 언론을 보고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재벌가 2세의 마약, 프로포폴은 너무도 많고, 그들이 갑질 하여 항공기가 회항하기도 했고, 국민들은 대기업 3세 경영을 위해 자신이 열심히 벌어 채워놓은 국민연금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온갖 특혜를 처가 장모 쪽에 제공하는 검찰 최고 권력 등 이러한 일이 너무도 많이 벌어져도 비판 없는 언론인과 선택적 분노를 하는 지식인들은 사법개혁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려던 장관의 가족에 대한 언론에 의해 마녀 사냥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져 침묵하거나 오히려 언론에 편승하여 비난한다.
바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거침없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권력자들과 이들에 대해 관대한 지식층등에 대한 관계가 모두 베버른이 기술한 유한계급론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최고 권력을 가진 계층의 2세 3세는 그들의 약탈성을 증명해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자격이 되기에 더욱더 약탈적으로 살상하는 행위에 익숙해져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 현실적인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능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 연장선에서 노동에 대해 천시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보수정권일수록 노동탄압을 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인 세금을 탈세를 옹호하는것이 설명이 된다.
기업의 최고경영자, 보수 정치인들 대부분 노동자들이 추구하는 일과 생활이 조화를 이루는 목표인 52시간제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이유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더욱 본질적인 목적은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야 보수화 된다는 특징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여유가 있으면 정치적 참여가 많아지고 자신들이 감시되기에 대중들이 정치혐오를 통해 정치적 무관심하게 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
정치와 세상사에 무관심한 대중들은 세부적으로 따져야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기에 언론은 왜곡 보도를 통해 시야를 왜곡시킨다. 경제뉴스를 보면 민주정부에서 객관적으로 세계 8위 실적으로 올라가고 선진국에 진입 등 실질적으로 한국경제가 좋아졌음에도 폭망으로 이야기한다. 반면 보수정권에서 좋지 않은 상황에도 좋아진다고 정파성을 띄고 상황을 왜곡한다. 그러다 IMF를 맞이한 적도 있었지만 그들의 왜곡은 이뿐 아니라 정책적 판단에도 왜곡을 하도록 한다. 예를 들면 언론은 종부세에 대해 대중들에게 불만 이미지를 투영함으로써 불쌍한 대중들은 정작 자신은 종부세 대상이 아님에도 종부세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재자 전두환에 거수경례 하는 가난한 추종자 (2021년 11월 24일)
이러한 장면은 우리가 극우 태극기 집회에서 낡은 옷을 입은 빈곤층 노인들이 참여하여 외치는 목소리를 보면서 알 수 있다. 결정적이었던 장면은 전두환 장례식장에서 양말에 구멍이난 사내가 경례를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소스타인 베블런의 이론을 현실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지 오웰이 찾은 한국사회 빅브라더 언론과 검찰 권력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네플릭스 영화 지옥에서 보여주는 지옥은 대중을 사로잡는 미디어와 미디어 속 의도라는 것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미디어를 통한 프로파간다는 히틀러, 군국주의 일본 등 전체주의 사회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 전체주의가 만연하던 시절 지식인이자 기자로 조지오웰이 있었다.
조지오웰이 살아서 오늘날 한국사회를 본다면 그의 소설 1984가 실현되었음을 실감할 것이다,
한국사회에 교체되지 않는 권력인 재벌, 언론, 검찰 등은 마치 하나의 권력집단처럼 대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조지오웰은 그의 소설 빅브라더에 대한 기술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예언처럼 보여주고 있다.
소설속에서는 증오의 시간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커다란 스크린에 대중을 모아놓고 누군가를 공격하면 대중들은 왜 나쁜지도 모른채 분노를 하게 된다. 결국 중세 마녀사냥처럼 이유도 모르고 분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이 현재는 무죄로 판결 난 조국 전 장관의 사모펀드 등 사건에 대하여 과거 의혹제기시와 달리 모든 언론이 조용하다. 과거 조국 전 장관은 검찰개혁을 통해 검찰 기득권을 깨려 할 때 언론은 그와 그의 가족을 총공격했고 대중들이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해 분노하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언론은 누군가 타깃을 만들어 공격하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힘을 발휘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게 희생되었고, 한명숙 전 총리, 등 모두 언론과 검찰에 의한 공작의 희생자들이었지만 대중들은 그 당시가 아닌 시간이 지나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부터 언론은 자본의 요구에도 하수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과거 삼양라면 우지파동으로 농심의 경쟁인 삼양라면은 힘든시기를 견뎌야 했고 오랫동안 농심이 승승장구했다. 최근에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게 된 손혜원 전의원의 경우 건설사와 연결된 언론사에서 손혜원 의원을 땅 투기처럼 몰아세우는 악의적 보도를 통해 대중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워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마녀사냥으로 인해 정치적 생명은 끊어졌지만 언론은 처벌받지 않았다.
조지오웰의 소설에서 빅브라더가 대중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방식으로 이중언어를 이용한다.
검찰출신 대권 후보는 광주 518 광주묘지를 방문한 이후 독재자 전두환을 옹호하기도 한다. 이후 전두환 옹호발언후 여론이 좋지않자 내키지 않는 사과를 하고는 사과는 개나 줘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대중을 기만하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태일 동상을 방문하면서 마치 노동친화적인것 처럼 이야기하면서 주120시간을 근무해야 한다고 한다.
소설 1984 속 빅브라더의 대중을 기만하는 프로파간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쓰는 이중언어와 이중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속 빅브라더는 전쟁은 평화, 예속은 자유, 무지는 힘 이라는 표현을 통해 대중들의 사고를 왜곡하며 겉과속이 다른 행위를 한다.
이러한 이중성을 통해 대중들의 가치관을 혼동시키며 선전선동한다. 독재자 전두환은 정의사회 구현이란 좋은 표어를 내걸고 사람들에게 폭력정치을 해왔던 사실을 기억하면 이들의 특징이 어떤것인지 알수있을것이다.
빅브라더로 대표되던 전체주의 기득권 권력집단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보고 있고 인간의 망각과 함께 무지한 인간을 만드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대중들은 자본을 독점한 기득권 집단이 의도를 가지고 미디어, 포털, 언론를 자본을 통해 독점하고 있다는것을 인지하고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받아들일때 현상의 본질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인식전환과 한걸음 나간 미래
언제나 세상은 진보하기도 하지만 후퇴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시간을 지나고 보면 분명 세상은 진화하는 흐름을 이어간다.
우리시대는 여전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식민지 협력자들로 이어진 권력집단과 21세기 각성한 시민들과 대결이 진행중에 있다. 조중동류 언론이 배출하는 연일 왜곡된 관점의 기사와 사법권력 횡포까지 이시대 그들은 조지오웰 소설 1984속 빅브라더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소설 1984 속 윈스턴과 달리 우리시대 시민들은 무기력하지 않고 진실을 알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랜시절 동안의 시민들의 죽음을 통해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를 깨고 나온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시민은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시민집단으로 과거 기득권위주의 교육시스템과 구조에 대한 이해하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가 집단에서 논의되는 이야기들이 이제는 시민사회에서도 이야기된다. 그것은 한국사회 대학에서 인문학이 쇠퇴한 반면 시민사회는 인문학 관심도가 증가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역설적으로 대학사회 교육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는상황에서 취업실적이 중요한 지표가된 직업소개소가 되어버렸지만 시민사회는 정보통신의 발전을 통해 다양한 정보와 현실경험을 통한 시민의식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사회 교육기득권은 모든 역사와 사회현상을 기득권 중심으로만 배워왔다. 대학에서 경영학과, 경영대학원은 있지만, 대부분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현실속에서 대학에서 배우는 과정중 노동학과 민주주의 인문학과에 대해 들어 본적 있는가? 대부분이 노동자이고 시민이지만 우리의 배움과 언론이 말하는 관점 모두 관리자 시각으로 맞춰있다.
우리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비록 많이 배웠다고 해도 소스타인 베블런이 주장한 것처럼 그들은 무능하고 낡은 사고관으로 대중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성과라고 생각하고 본질적 혁신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1970년대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 경영과 노동에 대해 실마리를 얻을수 있었다.
청계 피복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 엄혹하던 시절 자신의 몸에 휘발류를 부우며 자신과 일하는 어린 소녀노동자들이 기계가 아님을 소리높여 외치며 마치 예수처럼 세상의 부조리를 끌어안고 불꽃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태일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전태일의 삶을 한단계 더 들어가 본다면 그는 분명 기득권 교육을 받은 엘리트 출신이 아니지만 노동자의 삶과 창업과 경영을 하려는 삶이 모두 전태일의 삶속에서 응축되어있다.
노동자 전태일은 근대화의 터널에서 기계 취급받는 어린 노동자들에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이 함께할수 있는 혁신기업으로 태일기업이라는 이상적인 기업공동체를 만들려고 했었다. 그는 공감을 통해 현재 시점에서도 혁신적인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기업은 현재만들어 진다면 여전히 혁신적인 기업형태이기에 오늘날 기업인들이 추구해야할 기업가정신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엘리트 정치인과 부모로부터 기업을 상속 받은 기업인들은 과연 리더로서 유능했었던가? 비록 학벌과 기득권 카르텔이 속하지 않고도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는 전태일 같은 노동자가 경영자가 되어 미래 위기를 극복할수 있는 공동체를 이룰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찾던 리더는 전태일처럼 혁신을 추구하고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끄는 따뜻한 리더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인식전환이 미래 인류 공동체를 진화 변화시킬것이다. <포스트모던 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