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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Apr 18. 2021

세월호,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세상은 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왜 세월호 리본을 달았나.


매년 4.16일이 있는 4월은 잔인한 달이다. 그리고 벌써 7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페이스북 계정에서 세월호 리본을 내리지 못했다.

한국인에게 세월호 사건은 어떤 의미였을까?

세월호 사고가 나는 것을 TV로 접하고 우리 가족은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한건 아이들 영정을 들고 언론사와 청와대 찾아 나선 부모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막아선 언론과 권력자들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막말과 수많은 회유 그리고 언론의 악의적 보도에 가슴이 무너진 부모들의 고통에 주목하는 주류 언론은 없었다. 


한국의 언론은 생명을 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취재도 하지 않고 전원 구조 오보를 내면서 계속 이해가 되지 않는 보도를 하면서 기레기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보기관은 이를 체계적으로 숨기는 듯한 상황이 너무 놀랍고 무섭게 느껴졌다.

2014년 5월 청년들이 행동하자며 시국토론을 했다.

사실은 우리 가족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같이 느낀 것은 세상에 대한 각성이었다.

충격적인 사건과 이를 통해 움직이는 세상의 실체를 접하고 나면 깊은 트라우마가 남는다. 

무능한 정치인, 공무원들과 숨기려는 자들과 거짓을 말하는 언론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자기 이익만 쫓는 권력과 힘 가진 자들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광화문 광장은 지금 한참 공사를 하지만 사건 직후 세월호 가족들은 농성을 했다.

나는 출근길 광화문 광장 화장실에 들리다 보면, 세월호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들이 노숙하고 아침에 초 체한 모습을 한 그분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분들을 보면서 어떤 위로를 내가 줄 수 있는지 마음이 답답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방에 세월호 리본을 달고 그분들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우리에게 세월호 리본은 우리가 함께 아프다는 공감의 표시였고, 세상이 변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전히 세상은 변화가 쉽지 않기에 여전히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



세월호 이후 세상은 변화했는가?


세월호 사건 이후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은 국회의원 박주민 의원으로 되었다.

그는 국회에서 많은 공감되는 활동을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에 대한 공격하는 언론 플레이를 보게 된다.

즉 누군가 기득권과 반대가 되는 행보를 보이면 공격을 한다. 마치 인체에 이물질이 들어올 때 자동적으로 공격하는 현상과 유사하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내내 부딪히고 닳아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즉 우리의 세상은 세월호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은 세상에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시절 세월호 사건으로 많은 사회적인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때 다짐만큼 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 다짐을 잊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세월호 상처로 시청 앞 광장 전시된 애도와 성찰 메시지 1 (2014)

 

세월호 상처로 시청 앞 광장 전시된 애도와 성찰 메시지 2 (2014)


세월호 상처로 시청 앞 광장 전시된 애도와 성찰 메시지 3 (2014)



세월호 상처로 시청 앞 광장 전시된 애도와 성찰 메시지 4 (2014)



세월호 상처로 시청 앞 광장 전시된 애도와 성찰 메시지 5 (2014)




지금도 세월호가 아닌 우리 사는 곳에서는 택배노동자가 쓰러지고 ,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하고 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전원 구조 오보를 낸 언론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들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행보로 언론이라는 힘을 활용하고 있다. 그 당시 언론은 기레기(기자 쓰레기)로 표현되었지만 이제는 기더기(기자 구더기)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로 더욱 심해진 측면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무능하던 공무원들은 여전히 현재도 공무원이고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기도 한다.

특히, 사법, 검찰 등은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기 위한 노골적인 모습으로 개혁 흐름을 멈추도록 온갖 압력을 다한다.


기존 보수 기득권 정치인들은 욕구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익이 중심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비록 소수지만 공동체 전체와 시대정신을 따르는 소수의 정치인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야 말로 시대를 바꾸어 가는데 우리들 민중을 대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픔이 아픔을 위로하다 


7년 동안 많은 것이 변화했다.

촛불 혁명을 통해 정권을 바꾸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변화와 함께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변화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존재한다. 


고 노회찬 의원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촛불광장을 지켜주던 박원순 시장은 성추행 협의로 의심받는 가운데 자살을 선택했고 오세훈 시장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언론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여전히 자신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었고 세상의 진실을 알기 위한 부분보다 세상은 여전히 자리 뺏기 싸움에 치중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변하지 못했다.


몇 년 전 고 노회찬 의원 서거 1주기에 생명존중 4.16 합창단을 만났다. 광화문 광장에서 만난 세월호 가족들이 그들의 아픔을 승화하여 또 다른 아픔을 위로하였다.

세상은 그렇게 아픔과 아픔이 만나고 위로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한쪽은 이기심과 탐욕이 함께하고 있다. 

그런 변화를 이끌어가던 사람들이 비록 우리 곁에 없지만 남은 우리들은 부서지고 깨지더라도 그들이 추구하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고 노회찬 의원 서거 1주기 세월호 합창단의 공연




변화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마치 좁은 산길을 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큰길로 만들어지듯 다만 잊지 않고 끊임없이 그 길을 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큰길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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