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1월 라디오...
많은 사람들이 1년 후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 믿었던 99년의 1월, 상연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상연은 학원 수업이 어서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기도 싫은 공부를 뒤로 하고 집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설레기도 했지만 상연이 기대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집에서 살짝 거리가 있던 학원은 기사 아저씨를 고용해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집에 갈 수 있게 학원 버스를 운영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는 꽤 늦은 시간에 학원이 끝나기 때문에 학원이 학부모를 대신해서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부모님이 학원에 거는 기대와 이를 위해 투자하는 비용은 상연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빨리 어른이 되어서 지겨운 공부를 끝내고 싶었고 방송 시트콤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재미있는 대학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학원에서의 공부는 지겨울 뿐이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집에 빨리 가서 잠을 많이 자서 어른이 되고 싶은 시기였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상연은 누구보다 빠르게 학원 버스로 갔다. 기사 아저씨에게 고개만 끄덕이고 상연은 운전석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상연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이 자리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사실 다른 아이들은 뒷자리를 좋아하지 앞자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연은 운전석 앞자리를 누구보다 빠르게 차지하고 싶어 했다.
상연이 운전석 앞자리를 좋아했던 이유는 라디오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디를 앉던 다 잘 들리긴 했지만 상연은 앞자리가 더 잘 들린다고 생각했다.
상연은 밤의 라디오를 좋아했다. 낮에도 가끔 라디오를 듣기는 했지만 밤의 라디오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고된 하루를 마친 자신을 위로하는 듯했고 라디오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포근함을 넘어 편안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미적거리면서 버스에 들어왔기 때문에 상연은 온전히 5분 정도는 기사 아저씨와 라디오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그런 상연을 쳐다보며 좋아하는 노래라도 틀어줄까 묻고는 했지만 상연은 그저 라디오만 듣고 싶어 했다.
사연을 읽어주는 DJ와 중간중간 랜덤으로 들리는 노래가 상연은 너무 좋았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이 아닌 남이 틀어주는 음악, 그리고 라디오의 편안한 기운까지.. 상연은 학원이 끝나고 버스에서 듣는 라디오를 무척 좋아했다. 상연은 그러한 느낌이 너무나도 좋았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라디오 방송에 집중하다 보니 상연에게 그 시간은 더욱 짧게 느껴졌다.
다음 방송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간직한 채 버스에서 내리면 추운 바람이 상연을 반겼다. 어린 상연에게는 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늦게 집에 들어오는 꽤나 고된 일정이었지만 차가운 겨울바람은 괴롭기는커녕 그 상연에게 시원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온 상연은 부모님이 사준 작은 라디오를 켜서 듣던 방송을 계속 들었다. 이불을 펴고 누워 따뜻하게 라디오의 소리에 이제 완전히 집중했다.
그때 DJ가 갑자기 상연의 이름을 말했다. 상연이 며칠 전에 보낸 사연이 라디오 전파를 탄 것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리니 상연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재밌지도 흥미롭지도 슬프지도 기쁘지 않은 평범한 사연이었지만 DJ는 상연의 사연을 읽어줬다. 상연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사연을 읽고 바로 상연이 신청한 노래를 들려줄 때 상연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방송을 듣는 다른 친구들이 이 이름이 나인 것을 알고 놀리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순간 들어 이불속에 자신의 얼굴을 숨겼지만 이윽고 나오는 자신의 신청곡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상연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였다.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듣고 싶은 노래였다. 상연은 행복한 기분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잠이 스르르 왔다.
노래가 끝나고 방송이 마무리되자 내일이 되면 상연은 어른이 되기를 꿈꾸며 라디오를 끄고 이불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