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0일 정보람의 하루

할아버지의 부재

by 우주 작가

명절이 되어 오랜만에 들른 할머니의 집은 예전보다 조용했다.

모임 인원 자체가 제한이 되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작년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부재였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한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특별히 친하지는 않았다. 어릴 적에는 꽤나 잘 따랐다고 하지만 기억은 잘 안 났고 이제는 가끔 명절에만 보는 사이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집은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이가 너무나 좋았다. 할아버지는 그 나이대 어른답지 않게 할머니를 챙기려고 했고 직접 요리도 하시고 집안도 치우시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몸이 불편하신 곳이 있었기 때문에 더 할아버지가 더 할머니를 챙기는 것이라고 아빠는 말했다.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를 의지하면서도 할아버지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손재주가 무척 좋은 분이었다. 명절이 되면 손주들을 모아놓고 그동안 손주들을 생각하면서 만든 나무 인형을 우리에게 주시곤 했다. 미적 감각은 없으신 분이라 상당히 웃기게 생긴 인형들이었지만 우리들은 기뻐하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그때 받은 장난감 중의 하나는 아직도 내 방 한편의 상자에 잘 보관하고 있다. 또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서 무엇이든 만들어주시는 분이었다. 할아버지의 창고에는 할아버지가 이곳저곳에서 모아 온 고물들이 많았는데 집안일을 하거나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도구를 그곳에서 만드시곤 했다. 그래서 집안 곳곳에서는 처음 보는 물건들이 많았는데 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위한 할아버지의 발명품이었다.


3년 전부터 할아버지는 계속 누워 계셨다. 나이에 비해 정정하시던 할아버지는 조금씩 기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셨고 누워 계신 때가 더 많았다. 명절날 찾아가면 내가 누군지 기억 못 하시기도 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나 역시도 굉장히 슬펐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만은 계속 기억하셨다. 자신의 아들도, 딸도, 손주도 잘 기억 못 하셨지만 할머니만은 계속해서 기억하셨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그 어디서도 본적 없는 슬픈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계셨다.


2년 전부터는 아삐는 할아버지를 뵈러 자주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서울로 돌아오신 아빠는 나에게 나무 인형을 쥐어주셨다. 어느 날 정신이 잠시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나에게 꼭 이거를 주라고 하셨다고 한다. 만들다만 나무 인형이었다. 나를 위해서 만드시다가 미처 다 못 만드신 인형이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눈이 침침해서 다 못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완전히 할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오신 것은 아니었다. 아빠한테 내가 이제 5살이니깐 이런 거 가지고 놀 때 아니냐고 말씀하셨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작년 가을, 할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은 무척이나 쓸쓸한 날이었다. 아직 죽음이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때라 누군가 죽는다는 것이 낯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가 내 마음을 더 슬프게 했다. 이제 정말 할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할머니는 한없이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계셨다.


다시 돌아온 설날, 오랜만에 할머니 집을 찾았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방에는 할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이 대신하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 가족들만 모이는 날이라고 한다. 생기가 넘치던 할머니는 말이 없어지셨다. 부모님은 할머니가 힘들까 봐 서울에서 맛있는 음식을 해오셨다. 할머니는 제대로 음식을 드시지 않았다.

할머니가 힘이 없으신 이유는 단지 할아버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두고 형제끼리의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빠 형제는 우애가 엄청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 반목하지 않았던 분들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서로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할머니는 그런 형제들한테 평생 잘 지르지도 않던 소리를 지르셨다고 한다. 아빠는 항상 다른 형제들의 가족을 비판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빠가 잘못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모습 때문에 할머니가 가지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가 요새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기운을 차려드리기 위해 안 하던 애교도 부려봤지만 할머니는 나를 보고 말없이 살짝 미소만 지으실 뿐이었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갑자기 내 손을 잡으시고 어디 갈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궁금해하며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를 따라갔다.

할머니는 굳게 잠겨 있는 할아버지의 창고를 여셨다. 그곳에는 언제 온지도 모를 골동품들과 한편에 마련되어있는 작은 작업대 하나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 장난감을 만들던 곳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가끔 이곳에 오신다고 하셨다. 젊은 시절부터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한 선물을 자신의 작업대에서 만들어 주셨고 귀중한 보석도 예쁜 옷도 아닌 먼지가 쌓인 물건들이지만 할머니는 그 물건들이 너무 소중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나는 내 보물도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작은 나무 인형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내 방구석에 마련되었는 할아버지의 선물로 꾸민 작은 보물 상자를 보여드렸다. 할머니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시면서 나에게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잘 간직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보니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밤이 되어 잠을 자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할머니는 나를 앉히더니 예전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만들어주신 선물들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사연을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할머니는 너무 늦은 시간인데 미안하다며 나에게 방에 들어가 아빠, 엄마랑 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오늘은 오랜만에 할머니와 자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늙은 자신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오늘 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다. 몇 번 내가 이야기하니 결국 할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랜만에 우리 보람이랑 이야기하면서 자야겠다'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학교에서 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려드렸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자곤 했는데 오늘은 그 반대가 될 것 같다. 할머니와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살아계실 때 이렇게 조금이라도 할머니와 이야기하면서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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