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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단이 Feb 08. 2021

<환상의 빛> - 빛과 어둠

장르 : 드라마
국가 : 일본
러닝타임 : 109분
개봉일 : 1995
주연 : 에스미 마키코, 나이토 타카시, 아사노 타다노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슬퍼지는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감명 깊게 본 나로서는 그의 데뷔작을 영화관에서 본다는 것이 참 좋았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담담하게 무겁다. 


 아마 나는 이 영화가 아랍어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일본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슬픔을 한 번도 격정적으로 토해내지 않고 계속 담담히 응축시켜 나가는 것이 종종 답답하게 느껴지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웃으며 배웅했던 사람이, 함께 자주 가던 찻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커피까지 마시곤 갑자기 자살해버렸다니... 원인도 모를 남편의 자살에 어떻게 슬픔을 표현해야 하고, 또 어떻게 지워내야 할 지 막막할 만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주요 인물들은 아이도 어른도 검은 옷을 주로 입는다. 꼭 언제든지 장례식장에 갈 수 있게 준비해 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뿐만 아니라 롱테이크로 촬영한 쇼트가 많아 긴 호흡으로 장면들을 보게 하여 마치 영화 속 인물들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것이 영화의 무게감에 더 힘을 주는 것 같다. 이런 색감과 촬영 기법이 뜻하지 않은 슬픔을 맞이한 유미코의 터뜨려 내지 못한 채 꾹꾹 눌러버린 감정을 관객들도 비슷하게 느끼게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게 된 타미오는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있는 일 아닐까라며 말한다. 그토록 미친듯이 아팠는데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라니... 하지만 맞는 말이기에 더 아픈 말이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기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낼 수 밖에 없고, 대부분의 그런 이별은 예고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삶과 죽음이란 건 아주 가까이에 맞닿아 있음을, 그리고 누구나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빛과 어둠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빛과 어둠의 대조는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강조되었고, 그것들은 인물들의 심리를 나타내주거나 영화 후반부의 복선이 되는 주요 미장센이었다.


 영화 초반부에 유미코와 이쿠오가 어둠 속에 누워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저 검은 화면 속에서 대사만이 조용히 오간다. 어렸을 적 고향을 찾아간다며 떠나는 할머니를 붙잡지 못한 트라우마가 담긴 유미코가 "있지. 난 왜 그 때 할머니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을까?"라는 말을 하자, 이쿠오가 갑자기 머리맡의 스탠드에 손을 뻗어 불을 켠다. 그러곤 "몰라. 내 할머니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라고 무심하게 대답한 뒤 제 손으로 다시 불을 꺼버린다.


 어렸을 적 할머니를 놓쳐버린 뒤 유미코의 인생은 줄곧 어둠이었다. 그 사건 이후 거의 모든 장면들은 어두침침하거나 밤이 배경이다. 그러다가 완전한 어둠 속에 있을 때 이쿠오가 잠깐 불을 켜주었다가 다시 그의 손으로 꺼버린다. 그는 유미코의 인생에서 빛이 되어주긴 했지만, 잠깐 뿐이었고, 그 빛을 제 손으로 없애버린 인물인다. 왜인지는 유미코도 관객도 모른다. 제 맘 속을 한 번도 얘기해준 적 업기에 유미코도 관객도 그저 자신에게 되물어야할 뿐이다.



재취 자리에 든 이후의 새 집에서도 유미코는 항상 어둠 속에 있다. 특히 자연광이 집에 들어올 때는 꼭 햇빛을 피하기라도 하듯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곤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유미코가 이사 오고 반 년 쯤 지난 여름,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는 장면이다. 타미오와 아이들은 마당에 수박씨를 누가 더 멀리 뱉나 겨루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유미토는 조용히 웃곤 하며, 할아버지는 한쪽에 조용히 앉아있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아이들은 햇빛을 온전히 받고 있는데, 유미코와 타미오의 앞모습은 빛을 받고 있지만 뒷모습은 반쯤 그림자에 잠겨있다. 할아버지는 시종일관 웃지도 않은 채 거의 그림자에 잠겨 있다. 사실 이 장면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장면에서, 할아버지는 지박령으로 보일 정도로 대사도 매우 적고 표정도 없으며, 화면 구석이나 어둠 속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빛의 양이 인물들이 심리를 묘사한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아이들은 그저 해맑다. 새엄마를 맞이하던 새아빠를 맞이하던, 뒤바뀐 환경에 잘 적응하고 학교도 다니고 뛰놀며 친남매처럼 커간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면 유미코와 타미오는 떠나보낸 배우자를 완전히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금슬 좋은 부부인 것 같지만, 사실은 둘 다 숨겨진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림자에 반쯤 잠겨있다. 할아버지의 비중은 크지 않지만, 유미코가 이사 온 첫날에 기도를 드리는 장면에서 잠깐 할머니의 사진이 나온다. 결국 할아버지도 배우자를 떠나보낸 사람인데, 그 슬픔에 점점 잠기듯이 그림자 속으로 잠겨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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