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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로멘스, 겨울밤의 한숨

정릉동 교수단지_김환배

by spacehost

정릉, 조선의 첫 왕후가 잠든 곳. 조선 왕릉들은 대개 남향을 바라보지만, 신덕왕후의 정릉은 유독 동동북향을 향하고 있다. 동동북쪽은 태양이 뜨기 직전의 방향이며,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상징한다. 조선 건국을 함께한 왕후의 능이 조선의 기운이 떠오르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일까. 이것은 조선의 기틀을 닦은 왕후의 운명을 반영한 배치일까, 아니면 풍수가들이 조선의 기운을 좋게 하기 위해 청룡의 기운을 강조한 흔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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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아래, 정릉의 남쪽에는 교수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50년 전, 서울대 교수님들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을까? 남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지형은 정릉의 음기와 겹치며 양기의 흐름을 막는 모습이다. 그래서였을까, 이 마을의 도로는 얼핏 남근 모양으로 남쪽을 향해 뻗어있는 형상이다. 전통적 풍수 관념이 단지계획에 영향을 미치던 그 시절의 의도적인 설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왠지 이곳의 커뮤니티는 어머님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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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의 정원 축제. 화사한 꽃과 초록의 식물들은 이 땅이 내뿜는 강한 음기에 균형을 맞추려는 본능적 몸부림이었을까. 풍수에서는 꽃과 화초의 색채로 밝은 기운을 더한다지만, 겨울밤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며 마주하는 이곳의 민낯은 그 어떤 풍수의 지혜로도 가릴 수 없다. 균열로 가득한 지하 주차장, 쓸쓸한 형광등 아래 늙어가는 대문들, 봄꽃으로는 덮을 수 없는 세월의 흔적들이 어둠 속에서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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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0여 세대의 공동주택과 90여 세대의 단독주택이 있는 이 마을에서, 축제 때 정원을 공개하는 집은 대략 10여 곳 뿐이다. 200세대가 넘는 다세대/다가구 빌라 주민들에게는 정원은 커녕 마당조차 그림의 떡이다. 좁은 복도와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주치는 이웃집 정원의 풍경은 그들에게 어떤 감정일까. 이틀간의 축제는 어쩌면 결국 누군가의 자랑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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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성비'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소상공인의 발 1톤 트럭에는 3톤을 싣는다(해외 트럭은 과적하면 차가 망가진다). 부자들의 사치품, 슈퍼카도 수작업의 페라리 대신 공장에서 찍어낸 가성비(?) 포르쉐를 선호한다. 빈부를 뛰어넘어 합리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단독주택이란 비효율적인 선택이지 않나? 심지어 어딜 가나 비슷한 모양의 단독주택들, 그마저도 각 시대마다 가장 빨리, 가장 저렴하게 지어올린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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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파트는 이전에 이 지역에서 반대했던 정비계획과 다를것이다. 조경과 광장은 기본, 공유주방과 게스트하우스, GX룸 등 말그대로 커뮤니티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사지형엔 테라스하우스로 개인마당을 갖출 수 있다. 1/n로 나눠 내는 관리비로 저렴하게 즐기는 동네 사람들과의 일상. 오히려 빌라소유주와 단독 소유자 힘을 합쳐 재개발을 하는 것이 모두에게 혜택일수도 있다. 우리의 가성비 DNA는 아파트를 선택하도록 등을 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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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S건설, publy



어쩌면 '효율과 경제성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가치'. 이 지역을 설명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 로맨틱한 수사는 우리의 가장 세련된 자기기만 일 수도 있다. 처진 보를 받치려 급하게 세워 높은 기둥들은 약 50여 년의 세월의 무게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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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교수단지'라 불렸던 이곳에 교수님들은 5년전에 마지막으로 모두 떠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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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가꿈'이라는 이름으로 위험한 노후 주택을 감추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편을 정당화하는 동안, 이곳에 신축 주택들은 더 높은 벽을 쌓는다. 봄날의 정원 축제는 화려하겠지만, 겨울밤 녹지 않은 언덕배기를 절뚝절뚝 오르셨던 할머니의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더 진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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