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에 만난 우리.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임에도 서울의 오래된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연스러운 풍경 탓인지 각자의 겉치레는 벗어둔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편한, 우리가 되었다. 어느 뚜렷한 목표 대신에 답사 후에 그 날의 감정을 기록하고 공유하기로 한다. 그렇게 서서히 마을이 주는 안도감과 포근함 그리고 서로의 에너지에 물드는 시간을 가진다. 설레는 봄에 만나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고 잔잔한 가을 바람과 살벌한 겨울까지 2023년 사계절을 낯설고도 익숙한 동네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 길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오는 물음의 파도에서 밀려온 감정이 사라지지 않도록 발자취를 남겨본다.
6월의 성북동,7월의 창신동과 충신동,8월의 한남3구역,9월의 정릉골,
10월의 백사마을,11월의 개미마을과 옥인동47번지,12월의 구룡마을과 성뒤마을
2023년 7개월간 한달에 1-2회 답사를 가지며 5명이 남긴 감정기록, 2024년 새해 한 단락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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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변유경/문화인류학자
서울로 돌아오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정옥씨가 서울시 재개발 지역 답사를 하고 감정기록을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떠나 있던 서울시간의 공간 기억을 짜맞추기라도 하듯,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에 호기심을 느낀 나는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고향이면서도 낯선 서울의 여러 가지 면모를 알게 되었다. 감정기록이라는 글쓰기를 통해 팀원들의 답사는 저마다의 스토리로 정리되었다. 같은 지역을 방문해도 써 내려가는 감정은 각자 달랐다.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 내심 고민도 많이 했지만,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는 것은 사라지기 때문이고, 기록한 것은 계속 남을 것이기 마련이기에, 2023년 나는 여기에 있었다고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관석/사진가
혼자라면 옷을 다 적시는 무더위에, 혹은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며 언덕을 오르내릴 수 있었을까. 길에 켜켜이 쌓인 온기만큼이나, 현장을 마주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동지들 덕분에 마음이 정리되는 나날이었다. 이 거대한 도시에 사람이 있음을, 다양한 풍경이 있음을 조금이라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이들이 곳곳에 있으니 조금 뒤 서울은 또 다른 얼굴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창윤/생태작가
생각보다 많은 공간들이 사라지기 전에 다녀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이렇게 자연스럽고 정겨운 공간들을 뒤엎어야 하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무엇을 위한 개발일까? 그냥 속 시원하게 재부동산화나 재자본화라는 말을 썼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아오고 이어온 도시의 발자취들은 어느 정도는 남겨지기를 바라며 골목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골목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들을 만났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한순간에 없어져도 인간을 제외한 모두가 자연의 순환 고리 안에서 살아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파괴 행위들은 그들보다 사실은 나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싶지 않아 추는 망각의 몸부림일지도.
안광일/건축가
시흥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나에게 판자촌은 그렇게 이질적인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 판자촌을 목격했던 어린시절부터 30년이 흘렀고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판자촌은 굉장히 이질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30년동안 대부분의 판자촌이 개발되어 아파트가 되는 과정또한 목격했다. 중고등학교시절 시흥에서, 대학시절 북아현동에서. 태어나서 기억이 가능한 나이부터 지금까지 주변에 공사장이 없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주변엔 늘 공사중이었다. 그래서 풍경이 바뀌어가는 것에 둔감했을까. 풍경이 바뀌는 것이 단순이 풍경뿐 아니라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삶과 인생의 궤적이 바뀌는 것이라는걸 이번에 답사를 통해서야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주변의 풍경이 바뀌는 것에 둔감했던 것을 반성하며 앞으로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 갈 때 그것이 자연이든, 농경지든, 마을이든, 도시든 그 변화의 맥락과 이어지는 결과 그리고 연쇄되는 작용 등에 더 깊이 생각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정옥/도시산책자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이 고향이라고 느낀 적 없고, 그저 해외로 나가 살고 싶었다. 도시의 사라지는 옛 건물들을 보면서 공간이란, 장소란, 집이란 무엇일까란 의문만 품은채 골목을 산책했다. 그렇게 10년을 거리와 동행하면서 그곳에 있던 시간 때가 묻은 나즈막한 작은 건물들과 이들의 옆에 있는 큰 나무들까지 흔적 없이 지워지고 그곳에 하늘을 쫓는 높은 건물과 가림막 처진 작은 나무들이 생겨남이 반복했다. 다시 돌아본 서울을 친구들과 거닐며 하늘은 파랗고 산은 초록, 졸졸 흐르는 물길과 짹짹거리는 새소리는 동화책에서 나온 그대로였다. 이 모든 생명체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서 우리와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래됨은 새로움을 덧 입히는 과정이다. 생명이 나이들었다고 새생명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도시환경도 마찬가지이다. 무분별한 개발은 서울의 정체성을 잃는 행위이다. 도시의 정체성은 곧 사회구성원인 개인과 연결된다.
살고 싶은 도시, 우리 동네, 나의 집. 결국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은 어디일까.
시절과 자연이 아직, 남아있는 오래된 마을에서 길을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