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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B Nov 17. 2019

명절 친정 탐방기

방목과 화합의 가족 잔치

설 명절을 쇠고 친정 가는 길. 시댁에서 한바탕 의무를 다한 우리는 친정에 왔다. 짐을 풀어헤치며 마음까지도 다 풀어헤쳐졌다. 4녀 1남 식구들이 다 모이니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방 두 개짜리 좁은 거실에 4녀 1남 형제들과 그 가족들이 한바탕 어울려 잠도 자고 이야기도 하고 술도 나눠 마시고 했다.


시댁과 친정은 이렇게나 다르다. 시댁에서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 마음들이 친정에 오면 다 녹아내린다. 나는 친정에서 울 엄마표 맛집 음식들을 먹고 난 뒤 쓰러졌다. 김치찜과 동태탕, 무채 절임, 돼지고기 두루치기. 느끼했던 속을 확 풀어주는 친정 엄마표 음식들. 게다가 추억의 누룽지까지 다 먹고 나니 뭔가 다 이룬 느낌이 든다. 포만감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비좁은 틈에 몸을 누이고 콜콜 잠에 빠진다. 여기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나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4녀 1남 사위들은 이제야 돌아온 탕자들의 연합체가 된 듯 ‘으쌰 으쌰’ 건배를 하며 재미난 이야기들은 나눈다. 형부는 손수 앞발로 담갔다며 머루 포도주를 건네며 너스레를 떤다. 머루 포도주는 정성 탓인지 깔끔하고 부드럽고 순수하다. 그러고 보면 친정은 방목과 화합의 잔치다. 각자 가진 것을 다 모아 나누게 되는 친정집에서의 분위기는 그래서 시댁과는 사뭇 다르다. 나도 시댁에서 가져온 곰탕 사골국과 떡국떡, 조미김을 친정에 와서 다 풀어버렸다. 딸이 넷이나 되는 친정집에 오면 각자 챙겨 온 먹거리들을 풀어헤치고 잔치를 벌이게 된다.


친정이 이렇게나 자유로운 화합의 현장이 될 수 있는 것은 딸들이 많아서 일거다. 친정 엄마도 3년 전부터 아빠 없이 혼자다. 아빠는 엄마와 합의 이혼하지 않고 별거에 들어갔다. 지금 아빠는 딴 여자랑 살고 있다. 아빠는 엄마 명의로 집 한 채 남겼고, 가족 대신 그 여자를 택했다. 엄마는 지금 결혼 안 한 막내아들과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조금 힘들지만 마음 편한 싱글 라이프다. 아빠가 언제 집으로 복귀할지는 알 수 없다. 엄마는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한다. 앞으로 엄마 아빠 둘 사이에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엄마는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고 조금 편안해 보인다.


친정집 대식구들이 밤늦은 시각까지 오밀조밀 거실에 다 같이 둘러앉았다. 동계올림픽 컬링과 에어리얼 경기를 시청하면서 각자 스포츠 경기 해설가가 된 듯 왁자지껄 다들 경기 분석에 들어간다. 4녀 1 남중 가장 먼저 결혼한 것은 셋째 여동생, 문희다. 문희는 22세에 나이에 자기보다 10살이나 많은 제부를 군무원 생활하다 만나 결혼했다. 불안한 엄마 아빠의 싸움을 피해 도망치듯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던 문희. 문희가 낳은 첫째 아들 찬수는 발달장애가 있다. 늘 말이 없고 약간 느릿느릿 책을 읽는 것 같은 발음으로 이야기하는 찬수는 어제도 그렇게 방 한쪽 구석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 방을 지켰다. 그러다 남편이 조카 찬수를 보고 “너, 야동 보냐?”하며 농담을 건넸다. 찬수는 “지금, 그런 말 하시면 안 되죠?”하며 정색을 했다. 이것이 이모부와 조카의 한밤의 산책으로 이어질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밤 세배의 시간. “봉투, 봉투 열렸네” 하며 일렬로 늘어선 엄마, 아빠, 아이들이 외할머니에게 세배를 했다. 문희는 방안에 있던 아이들에게 “애들아, 할머니한테 세배하자”라고 했고, 24살 청년 찬수는 “나, 애들 아니에요. 나 어른이에요.”하며 버텼다. 문희는 찬수에게 큰 소리를 쳤고, 찬수는 억지로 나와 세배를 했다. 가슴에 자기만의 억울함이 남아 있던 찬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버티다 다시 엄마에게 혼이 났다. 조금 어리숙하고 말이 없고 착하기만 했던 찬수는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다. 확실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던 아이 찬수는 지금 24살 청년이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과 소통하는 중이다.


찬수는 계속 “나, 이제 어른이에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 줄 아세요?”하며 항변을 이어갔다. 남편이 찬수에게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며 밖으로 불러냈다. 그렇게 한밤에 같이 밖에 나간 둘째 이모부와 조카 찬수. 자기 마음속에 분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몰라 부르르 떨고 소리를 지르며 과격해진 찬수를 보고 남편은 조금 놀랐다. 그러면서도 ‘찬수가 다 컸구나, 이제 평범한 젊은 청년이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청년이구나, 조금은 사회화되지 않은 모습이라도 어엿한 청년이 되었구나.’ 느껴져서 안심했다. 찬수의 항변을 다 받아준 뒤 꽉 안아주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두 남자는 좁은 방에서 같이 누워 잠을 잤다. 한바탕 큰소리치고 과격했던 밤이 포근하게 유혹하는 새벽 속으로 사라졌다.


‘가족이란 말이야~한바탕 소란도 다 덮어주는 이불 같은 거 아니겠어? 거기엔 변화의 아픔도, 성장의 눈물도, 슬픔과 웃음도 다 함께 녹아 있어. 그런데, 그 이불 함께 덮고 나면 훨씬 그 사람을 잘 알게 된 거 같아. 그 사람과 훨씬 가까워지고 편안해진 것 같아.’


오래간만에 좁은, 그러나 넓고 넓은 친정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나는,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앉은 내 그림자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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