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이 되기 위해선 능력을 버려라
"너네 집은 에어컨 필터 누가 청소하니?"
갑자기 찾아온 더위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일까. 사랑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에어컨 필터 타령이라니.
A가 뜬금없이 에어컨이 대두된 요지는 이렇다.
얼마 전 회사에서 에어컨 필터 청소를 하던 A.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기도 하고, 다른 부장님들이 하실 바엔 그나마 젊은 본인이 하는 것이 속이 편했더랬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필터를 닦고 있던 A를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남자 부장 B 씨.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청소하는 A 씨가 기특해 보였을까, 칭찬을 해주려는 듯 다가간 B 씨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그래서 네가 대접을 못 받는 거야."
B 씨 조언에 따르면, 대접받는 것도 습관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혼자 알아서 잘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잠깐 B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그의 평소 행실로 미루어보아 정말로 아끼는 부하직원을 향한 그 나름대로의 걱정 어린 말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월론자라든지, 페미 혐오주의자는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길)
고로 에어컨 필터를 먼저 나서서 스스로 닦는 A와 나는 남자들에게 소위 여왕처럼 대접받지는 못할 팔자라는 것이다. 아하, 지금까지 혼자 바둥바둥 힘들었던 것이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의 인생에 대한 어리석은 반추가 시작되었다.
혹자는 신체적인 것만 보더라도 이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주고, 여자는 받는 존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은 무엇일까. 가진 능력을 버리고, 그저 누군가 주기를 바라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진정 자연의 섭리인 것일까.
만약 여왕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무능력이라면 나는 기꺼이 왕좌를 포기하겠다.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대접을 기다리느라 내 인생을 하염없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애초에 21세기의 여왕이란 그저 몇몇 나라에만 남아있는 관습적인 존재이니 말이다. 지금의 시대는 여왕이 아닌, 대통령/총리라는 능력 있는 지도자가 인재들과 함께 나아가는 사회가 아니던가. 능력 있는 지도자든, 아니면 그와 함께하는 인재든 나는 내가 길러온 능력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려 한다. 뭐, 함께하는 인재 중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파트너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대접받자고 능력을 버리기엔 내가 너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