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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Mar 15. 2024

2배속으로 삽니다

잠시 외출해서 볼 일을 보고 집에 왔다. 오자마자 빨래를 돌렸고 빠른 걸음으로 분리수거를 하고 왔다. 시계를 슬쩍 보고 OTT 중 하나를 골라 눌러본다. 보고 싶은 드라마, 놓친 방송을 원하는 시간에 바로바로 보고 싶어 온갖 OTT를 모두 구독했다. 정해진 편성표에 내 시간표를 맞출 수는 없기에 커피 한 잔 덜 마시지 하는 마음으로 신청한 구독 서비스는 국 끓이려 불려둔 미역 같았다. 이 정도면 너무 적지는 않겠지 하고 물에 넣어둔 미역은 매번 놀랄 만큼 불어나있다.


요즘 인기몰이가 한창이라는 드라마를 골랐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바로 하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 있다. 재생 옵션을 선택해 배속을 최대로 올린다. 외국드라마도 한국드라마도 자막은 필수다. 한국드라마도 자막을 켜는 것은 빨리 지나가는 대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굳이 이렇게 까지 해서 드라마를 봐야 하나? 당연하다. 한정적으로 주어진 자유 시간을 압축해서 보내고 싶은 마음을 위해 필요한 조치다. 음미하며 감상에 빠져들 시간이 없다. 배속을 높이면 2회를 볼 시간에 3회를 볼 수 있다. 아주 훌륭한 작전이라 감탄하며 다음화를 누른다. 오프닝 건너뛰기 클릭!

디즈니+는 배속이 안 돼서 얼마나 답답하던지!!

압축팩을 이용하면 수납공간을 배로 늘려준다는 말에 혹해 구입해 본 적이 있다. 놀라운 세계였다. 시간도 압축하면 두 배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급하게 드라마 보고 헐레벌떡 일을 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인데 2배속으로 돌리면 48시간처럼 쓸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압축팩 속에서 한참 동안 쪼그라져 있던 이불과 옷들은 다시 필요해 꺼냈을 때 원상태 그대로는 회복되지 않았다. 드라마를 급하게 보다가 내용이 머릿속에 안 들어와 다시 뒤로 다시 돌려본다. 급하게 하는 일들은 늘 실수가 뒤따르는 탓에 수습하는 과정이 빠지지 않는다. 급하게 먹는 떡이 체한다는 말이 딱이다.

『타이탄의 도구들』에는 ‘디로딩’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디로딩이란 본래 근력 운동이나 경기를 위한 훈련에 사용되는 개념인데, 이 책의 많은 타이탄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디로딩의 가치를 적용하고 있다.
디로딩은 '내려놓는', '뒤로 물러나는', '부담을 제거하는'등의 뜻을 갖고 있다. 즉 촘촘하게 짜인 계획과 일에서 잠시 물러나 컨디션을 조절하고 회복하는 행동을 디로딩이라 할 수 있다. (중략) 디로딩 주간을 가지면 삶의 과부하들을 지혜롭게 예방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속도를 내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쉬고 내려놓고 멈추는데 더 나은 삶을 위한 속도를 낼 수 있다니. 내가 원한 것, 필요한 것이 '디로딩'이었구나. 멈추고 돌아보지 않고 성급한 마음에 모든 일과 생각을 몰아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빨리 결승선에 도달하고 성과를 내고 싶어 마음속에 조급함과 초조함이 가득 찼던 것 같다. 냉동식품이지만 예열한 프라이팬에 약불로 은근하게 구운 떡갈비는 전자레인지에 돌린 것과는 맛이 다르다. 숙성시간이 필요한 것은 고기만이, 망고만이 아니다. 레인지에 돌려 2분 만에 완성되는 인스턴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뭉근하게 끓여서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곰탕 같은 하루를 살고 싶다.




도자기 만드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늘하고 수분을 적당히 머금은 흙을 만지는 시간은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다. 두통이 한창이던 때였는데 도자기 수업 시간에는 멈춤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두통도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사용하고 싶은 그릇을 생각해 보고 지인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릇을 골라서 즐거운 기분을 담아 만들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선생님 말씀을 듣고 따라 하면 그릇이 하나씩 완성이 되는 것도 아주 뿌듯한 시간이라 도자기 가는 시간은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도자기는 마지막에 마감을 하며 구멍은 없는지 가장자리 부분이 거칠지는 않은지 잘 살펴야 했다. 차분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잘 마감해야지 후다닥 급하게 보고 대충 넘기면 가마에 들어간 도자기가 뜨거운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금이 가거나 터져버렸다.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일 수록 완성도 높은 그릇이 내 손에 주어졌다. 내가 들인 시간은 어디 가지 않고 예쁘고 매끄러운 도자기가 되어 고스란히 내 손 위에 남았다.

2배속으로 보던 화면을 정속으로 돌리면 대사 사이에 배우들의 호흡소리가 들린다. 쉼 없이 빠르게 지나치던 화면에서 감독들이 숨겨놓은 것 같은 재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습관처럼 빠르게 발을 떼고 당연한 듯 조바심이 느껴지면 심호흡을 해봐야겠다. 지금은 멈추고 돌아볼 시간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야겠다.

공들인 그릇은 확실히 더 오래 잘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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