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여유 Apr 10. 2024

참기름아이스크림, 그 맛은?

가장 길게 한 아르바이트는 학교에서 했다.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하고 장학금 명목으로 아르바이트 비용을 주었다. 공강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었고 그 돈으로 방학마다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아버지 회사에서 등록금이 지원되어서 가능했지만 부모님께 손 내밀지 않고 원하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내가 일하던 곳은 '학적과'였다. 학생들의 성적을 처리하는 부서인데 보통 학기 초, 학기말에 많이 바쁘고 학기 중에는 한가해지는 곳이었다. 리셉션처럼 앞에 앉아 방문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간단한 업무는 해결을 해주지만 전화를 하지 않고 찾아왔다는 것은 대부분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 많다. 관련 업무 하시는 교직원 선생님들께 가도록 안내를 한다. 뭔가 애매한 업무일 경우, 나도 모르게 A선생님에게 인계했다. B선생님은 자기 업무가 아닌데 학생을 보면 후에 꼭 한소리 하셨기 때문이다. A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에 더하여 착한 사람들이 손해 본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원생과 학부생이 조를 이루어 일을 해서 좋았다. 선배들과 큰 교류가 없었던 나는 다른 과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재밌었고 대학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업무 자체도 학교 성적에 관련된 정보들을 많이 알 수 있어서 학교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내 전공은 복수전공 말고도 연계전공도 이어져 있었다. 복수전공만큼 학점수를 많이 채우지 않아도 관련 내용을 배우고 학사학위를 하나 더 딸 수 있었는데 학적과에서 배운 지식들을 충분히 활용한 결과였다. 주전공, 복수전공, 연계전공은 세 원으로 그려 서로의 교집합을 체크해 가며 수강신청을 했다. 연계전공 내용 자체가 전공과 겹치는 것이 많고 이수과목 담당교수님 수업이 재밌었지만 아무래도 취직에 대한 우려 때문에 뭐든 한 줄이라도 더 채우려는 욕심이었다. 학사학위 하나 더 있는 것이 갓 입학한 학부생 입장에서는 대단해 보였고 그러면 내 전문성이 입증되는 줄 착각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취업에 성공해서 졸업할 때 나 홀로 갈 곳 잃은 아이가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신나게 수업을 신청해서 들었다. 바쁠 때는 많이 바빴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고 방학도 있고 퇴근은 칼 같아서 나도 교직원이 되고 싶었다. 근무하시던 선생님들도 여기로 취직하라며 졸업하면 내 자리라도 마련되어 있는 줄 알고 마치 남들 몰래 행운권을 뽑았나 했다. 학부 성적은 거의 만점에 회계사,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분들까지 지원하는,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 줄 서 있는 꿈의 직장인 줄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지하서고에는 수많은 서류철이 보관되어 있었다.

서류를 많이 보관하던 곳이었고 아직 전산화가 되지 않았던 때라 성적마감이 되면 서류철 하느라 바빴다. 서류에 구멍을 내서 검은색 끈으로 짱짱하게 묶는다. 두꺼운 종이를 덮어 표지를 만들었는데 앞에는 2개를 덮어 하나는 1/3 지점에 칼등으로 선을 그어 깔끔하게 접어 넘긴다. 이 작업은 뭐든 손으로 만들기를 좋아하던 나에게 딱이었다. 종이의 각을 맞추고 한데 모아진 서류뭉치를 끈으로 틈 없이 고정하면 그게 그렇게 보람찼다. 나중에 회사에서도 자주 써먹을 기술을 획득했다 생각했지만 딱 한번 썼다. 역시 써먹을 데가 있을 줄 알았다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칭찬받을 생각에 열심히 만들었다. 과장님이 보시더니 "이거 왜 이렇게 했어? 그냥 대충 철하지. 뭐 하러 시간 들여."라고 하셨다. 학적과에서의 경험은 이력서에서도 큰 힘을 못쓰더니 회사에서도 쓸모를 찾지 못하고 헤맸다.




그럼에도 그때 썼던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내 중심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꿀 줄 알아야 함을 깨달았다. 어떤 경험이든 쓸모없는 것은 없다. 실패를 경험했다면 실패한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생생한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한다. 유익하고 쓸모 있는 경험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허다하다. 나만 유독 운이 없다고 한탄하는 대신 시선을 달리 해보기로 한다. 안 보이는 구석에 숨어있는 보물을 발굴하는 심정으로 경험을 대해 본다. 진흙이 가득 묻혀있는 호리병이 알고 보니 국보급 보물일 줄은 파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작은 성공을 쌓으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작은 실패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별거 아닌 실패를 하고 나면 어떻게 하면 좋은 경험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시도해 볼 수 있다. 작은 실패 경험하기에는 아이스크림집에서 새로운 맛을 먹어보는 것이 제격이다. 골라먹는 곳에 가서 굉장히 새로워 보이는 맛을 선택해도 좋고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가서 한 번도 눈길 주지 않았던 것을 사보는 것도 좋다. 그렇게 고른 아이스크림이 맛이 없을 때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먹어봤는데 아주 신기한 맛이야. 그런 아이스크림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직접 먹어보고 한 말과 어디서 들어본 말의 힘은 천지차이다. 시도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찾던 맛인 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 그럼 그야말로 숨겨진 금맥을 찾은 것이다, 심봤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갈 때마다 먹었다.
이전 16화 인테리어 할 때 챙겨야 돈 버는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