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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Apr 17. 2024

나는 왜 하필 야구를 좋아해서

딸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아이고, 딸이 이렇게 이뻐서 아빠가 껌뻑 죽겠네."

"아빠가 딸바보겠네. 회사 가기 싫겠어."


딸이 인형처럼 예뻤다는 말이 아니다. 조그맣고 귀여운 딸이니 딸바보는 당연하다는 듯 건네는 말들이었다. 네다섯 살 조그마한 여자아이들을 보면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답을 들으려는 말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때마다 속에서 답을 고르느라 분주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혹은 '딱히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라고 굳이 답하고 싶었던 마음에는 남편에 대한 작은 서운함이 담겨있었다. 남들은 이렇게 예뻐하는데 왜 예뻐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남편이 아이를 전혀 예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표현 많이 하시는 친정아버지 밑에서 자라 상대적으로 적게 표현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큰아빠가 혹은 아이의 삼촌이 아이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하면 아빠보다 더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다고 괜히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적도 있다. 남편은 당연히 예쁘고 많이 사랑하지만 꼭 수선을 떨어가며 표현을 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직 어린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도 했다. 무뚝뚝한 시아버님을 생각하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오랜 야구팬이다. 야구시즌에는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야구중계를 튼다. 퇴근하며 보던 야구경기에 대한 평을 하며 우리가 못 봤을까 경기를 요약한다. 매번 틀어져 있는 야구에 크게 관심 보이지 않던 아이가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아빠와 같은 팀을 응원하며 선수들에 대해 묻고 야구 경기 규칙에 대해 물었다. 남편은 무언가를 아주 세세하고 다정하게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 뛰어난 능력이 딸아이와 야구를 볼 때 특히 빛을 발한다. 아이가 잘 못 알아들어도 끝까지 차분하게 설명하고 다시 한번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해 준다. 오랜 팬이었던 만큼 팀에 대한 이야기도 한 보따리, 선수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한 트럭이다. 해줄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아 긴 야구경기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눈다. 늘 바빠서 아빠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아이가 그 시간을 무척이나 즐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심으로 신이 나서 아이에게 야구 이야기를 하는 아빠의 마음을 아이는 오롯이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연애하면서부터 야구를 보기 시작해 같은 팀을 응원하는 나 역시 남편의 여러 이야기와 설명이 아주 재미있다. 게다가 작년에는 응원하는 팀이 성적이 좋아 세 가족이 매일 저녁 신이 나서 목소리 높여 응원을 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팀을 응원하고 경기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유대감을 쌓았는지 모른다. 응원하는 팀은 결국 우승을 거머쥐었다. 몇십 년 된 해묵은 소망과 기나긴 기다림을 보상받아 어마어마한 기쁨을 느끼는 오랜 팬을 보며 아이와 나는 생생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야구장나들이는 재작년부터 종종 했다. 유니폼을 입고 응원도구들을 챙겨 현장감 가득한 응원을 하는 야구장을 아이가 안 좋아할 까닭이 있을까. 식은 치킨과 피자도 맛있게 만들어 주는 야구장에서 우리는 항상 즐겁고 매번 신났다. 남편과 딸아이가 목놓아 같은 팀을 응원하는 모습이 흐뭇했다. 야구장의 열기를 즐기며 소중한 추억을 아로새겼다.


야구에 관심이 생긴 참에 아이에게 야구에 관한 정보가 담긴 책을 사줬다. 아이는 꼼꼼하게 책을 읽으며 야구 지식을 넓혀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이는 요즘 야구를 보며 아는 척을 많이 한다. 아이가 종알종알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꽤 많다. 남편은 모르는 척 들어주기도 하고 은근슬쩍 이야기를 수정하거나 덧붙이기도 한다. 아빠엄마에게 야구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사실에 아이는 매우 고취되어 있다. 이제 야구시즌이 되었다. 아빠와 아이는 중계를 보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선수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경기를 판단하고 해설하느라 아빠와 딸의 입은 쉴 새가 없다. 두 사람의 수다가 내 귀에 달콤한 사탕이 되어 들려온다.

야구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강력 추천하는 책

얼마 전에는 집에서 꽤 멀었지만 고척돔에서 열린 서울시리즈 구경을 갔다. 프로야구 이외의 경기를 처음 접한 아이는 MLB 야구팀과의 경기를 생각보다 더 신이 나서 관람했다. 그날 역시 남편과 아이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야구장에 같은 유니폼을 입고 청소년 딸과 야구를 보러 온 중년의 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딸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경기장에 함께 온 것만으로도 보기 좋았다. 같은 공간과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함께 공유한다면 갈등이 생겼을 때도 쉽게 풀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 믿는다. 서로 다퉈서 사이가 서먹해져도 야구경기를 보다 슬그머니 같이 응원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 모습을 남편과 딸아이에게 기대해 본다. 서로 살갑게 지내지 않아도, 시시콜콜 일상을 공유하지 않아도 야구장 가는 사이로 지낸다면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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