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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Apr 24. 2024

다이어트 필수품, 양배추라페

양배추라페. 다이어트를 검색한 것을 기가 막히게 눈치챈 SNS가 알고리즘을 타고 날 양배추라페 앞으로 인도했다. 이거 먹으면 살이 빠진다고 한다. 아무래도 스마트폰 액정에는 눈동자를 추적하는 센서가 장착되어 있는 것 같다. 양배추라페 만드는 영상을 안 보는 척 곁눈질로 봤는데도 들켜버렸다. 안 만들고는 못 배길 거라고 놀리는 듯 여기저기서 양배추라페영상이 무한 재생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트에서 양배추 한 통을 사들고 왔다. 식당에서 주는 양배추 요리는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한다. 돈가스집에서는 아이 것, 남편 것까지 다 내 차지인 게 신난다. 고깃집에서 주는 양배추는 몇 번씩 리필해서 먹기도 한다.


집에 온 양배추는 사뭇 다른 대접을 받는다. 양배추를 사서 끝까지 먹어본 적이 별로 없다. 농구공만 한 양배추는 손질부터 난관이다. 채 썰고 소분해서 다들 야무지게 끝까지 잘 먹던데 난 왜 장바구니에서 꺼내자마자 귀찮아질까. 사온 그대로 냉장고에 입장하게 되면 양배추는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버티기에 들어간다. 몇 번 요리를 해 먹고 결국 썩어서 버리게 된다. 이번엔 양배추를 망부석 같은 돌멩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본다. 먼저 도마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씨름하며 자른다. 수박은 어느 정도 자르면 쩍 하고 갈라지기라도 하는데 양배추는 반이상을 동강내도 요지부동이라 없는 팔근육을 다 몰아 써본다. 심지 부분은 분리해야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해서 잘라낸다. 오늘의 요리에는 채 썬 양배추가 필요하다. 채칼을 쓰면 너무 얇아져 식감이 살 것 같지 않다. 과감하게 손칼질을 택한다. 다행히 아주 얇게 썰지 않아도 되어 부담이 없다. 열심히 썰기 시작하니 양배추 조각들이 도마 바깥에 사방으로 튀며 존재감을 나타낸다. 손목이 아파올 때쯤 멈추고 양푼에 한데 모아보니 수북하게 쌓여 양이 꽤 된다. 이 정도면 식사 때마다 많이 먹어도 며칠은 먹을 수 있겠다. 양념을 넣어 섞을 차례다. 아까 보았던 레시피를 기억해 낸다. 올리브유, 식초, 레몬즙, 설탕, 홀그레인머스터드. 레시피대로 양을 재지 않고 느낌대로 만들어보기로 한다. 한데 꺼낸 양념들을 하나씩 넣는다. 설탕대신 당이 적다는 알룰로스를 넣어본다. 식초 대신에는 발사믹식초를 넣어봐야겠다. 화이트발사믹이라 색이 없어 적당하고 샐러드와 잘 어울릴 것 같다. 마지막으로 풍미를 살려줄 후추도 뿌려준다. 적당히 넣은 양념과 채 썬 양배추를 뒤적여가며 잘 섞어준다.

완성이 되었다. 한 입 먹어보니 간도 잘 맞고 아삭아삭 맛있다. 빵을 구워서 올려 먹으면 참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샐러드를 다 먹은 후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다디단 초콜릿케이크를 한 입을 곁들이면 딱 좋을 것 같다. 살 빼겠다고 만든 샐러드 앞에서 먹기도 전에 딴생각이 잔뜩이다. 과자와 빵을 줄이지 않으면 양배추를 아무리 먹어도 다이어트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탄수화물과 당에 중독된 사람처럼 디저트에 목숨을 건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군다. 원래 그랬는지, 어떤 계기로 습관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원인이 밝혀진다고 한들, 현재 상황을 해결할 열쇠는 아니다. 다이어트가 학문의 영역이라면 박사학위는 따놓은 당상인 언니에게 조심스레 질문한다. 케이크를 먹는 대신 밥을 줄이면 안 되겠냐고. 차라리 밥을 먹으라고 한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접전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으면서 고집을 부려본다. 10년 동안 라면 먹은 것은 손에 꼽아요, 아는 맛인데 떡볶이 왜 먹나요, 같은 유명한 말들이 떠오르지만 시도해 보기 전부터 자신이 없다. 긴 시간 동안 기약 없이 간식을 끊을 자신이. 운동을 몇 시간씩 하는 것은 하루도 해내기 어려울 듯 하다. 거의 하는 것 없이 바라는 것만 가득한 놀부심보다. 이미 진 게임 같아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포기하지는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하루이틀 만에 해결될 일이 아니니 길게 보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운동이 싫어도 매일 조금씩 공복유산소 운동을 해보기로 한다. 간식을 끊을 수 없다면 먹는 양을 줄이고 공복시간을 길게 유지해보려 한다.

세상에는 왜 이토록 맛있는 디저트가 넘쳐나는 걸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살 빼야 해. 마흔 지나면 한 해 지날수록 살 빼기가 몇 배씩 더 어려워진다."

"운동 꼭 해. 이제는 다른 이유가 아니고 살기 위해서 운동하는 거야. 미리 했으면 덜 힘들었을 거야."

몇 년 전부터 언니들이 누차 말했던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진심으로 해줬던 충고가 그때는 왜 와닿지 않았을까.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다이어트까지 어려워지다니 충고를 가볍게 넘겨버린 내 탓이다.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쉬워지는 것이 아니고 어려워지는 것이 있다고 감사해야겠다. 겹겹이 쌓인 연륜 속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많은 일들이 해결된다면 세상살이가 시시해 질지도 모른다. 작년보다 한층 어려워진 다이어트지만 간절하게 임해보자. 다만 이 도전을 지속하려면 적절한 정도의 어려움이 필요할 것 같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딱 그 수준의 어려움이면 좋겠다. 조물주님, 난이도 조절 부탁드립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는데 고작 양배추라페 하나 만들어 놓고 조물주님 소환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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