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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May 08. 2024

늘 먹던 거 금지!

남편이 회식 메뉴를 정할 수 있다면, 항상 빨강 고기다. 10번 중의 9번은 빨강 고기다. 빨강 고기가 대체 뭐길래. 빨강 고기를 먹고 온 날에는 옷에 냄새가 굉장하다. 의류관리기에 옷을 돌려도 냄새가 어딘가 남아있는 듯해서 결국 세탁을 하게 된다. 맨날 바쁜 남편이라 남편친구들이 회사 근처로 모이는데 그럴 때마다 빨강 고기를 먹는다. 오랜 친구들이라 편해서인지 만취하는 경우가 많아서 먹어본 적 없는 고기에게도 날 선 감정을 느낀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궁금한 것도 크다. 대체 무슨 맛이길래 매번 먹는지, 안 질리는지 궁금해 죽겠다. 드디어 빨강 고기를 먹어볼 일이 생겼다. 푸근하고 친절한 사장님이 반겨주셨다. 자리가 많지 않다. 일층에 3-4자리가 있고 절벽같은 계단을 올라 2층에 가면 3-4자리가 있다.

메뉴가 엄청 단출하다. 돼지 등심 양념구이. 드디어 빨강 고기의 정체를 알았다. 국내산 돼지 등심 양념구이였구나. 고기가 나오자마자 빨강 고기라는 별명도 단번에 이해됐다. 정말 말 그대로 빨갰다. 모든 양념 고기가 그렇겠지만 열심히 뒤집어주어야 타지 않는다. 흔한 된장찌개, 김치찌개도 없어서 오롯이 단백질을 충실하게 섭취하게 되는 훌륭한 다이어트식이다. 파절이 말고는 별다른 밑반찬도 없다. 물론 파절이가 꽤 맛있다. 아삭한 식감에 새콤달콤한 양념이 약간 퍽퍽하고 매운 고기와 잘 어울린다. 그토록 궁금했던 빨강 고기인데 막상 먹어보니 엄청난 맛은 아니다. 강렬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 자주 많이 먹을 수 있나 싶다.

얼마 전에 SNS를 구경하다가 MBTI별 금지하면 미치는 항목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쭈욱 보다가 남편 MBTI를 확인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남편의 금지항목은 ’늘 먹던 것‘이었다. 보자마자 진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남편은 어떤 식당에 가도 기가 막히게 자기가 먹던 메뉴를 찾아 시킨다. 늘 먹던 거 금지라고 말하면 당황해하며 안절부절못할 모습이 상상이 됐다. 반면 나는 같은 식당에 가도 먹어본 메뉴보다는 안 먹어본 메뉴를 시킨다.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잃은 듯 절망적인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다. 이렇게 성향이 다른 사람이 만나 가족을 이루고,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 백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되고 긴 설명을 들어봐도 조금도 납득이 안 됐다. 어느새 다름을 인정하게 된 것은 오랜 세월 함께해서일까? 혹은 나이를 먹으며 조금은 어른이 된 걸까. 서로 등 돌린 채 멀어지기보다는 서로를 마주 보며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다. 비록 평생을 지나도 손 마주 잡을 수 없는 차이더라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면 그게 성공이다. 궁금하던 빨강 고기를 먹고 남편이 말아준 황금 비율의 맥사(맥주+사이다)를 먹어 한껏 너그러워진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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