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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Nov 02. 2023

이 열차는 무인도, 무인도행입니다.

파워 E형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떠나는 것은 언제나 설렘이 가득하다. 출처: 픽사베이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데, 최근에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무인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혼자 있고 싶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새로운 곳을 가보고, 새로운 것을 맛보고, 새로운 삶을 보고 싶어서인데 무인도? 무인도는 내가 원하는 여행의 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않았는데? 많이 지쳤구나, 누군가 말한다. 맞다. 그럴지도 모른다. 무인도 갈 때 핸드폰도 놓고 가야겠다. 아무도 날 찾지 말아요. 파도소리, 새소리만 들으며 책 읽고 낮잠 자고 그러다 멍 때리고.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하다. 무인도정도 되어야 누가 접근하지 않을까 싶어 그런가.


그런 카페를 상상해 봤다. 이름은 무인도. 입장할 때 헤드폰을 받고 핸드폰을 제출한다. 조그마한 방에는 빈백 하나만 달랑 있다. 오늘 내가 선택한 방은 숲 속. 벽지는 청량한 숲 속에 와있는 듯 초록초록하고 코끝에는 은은한 우디향이 맴돈다. 시간을 예약하고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시간이 되었다고 방에 알람이 울린다. 아, 정액권 끊고 싶은 이 카페. 정말 지독하게 지친 건가?




사람을 만나서 에너지를 채우고 집에만 있으면 기운이 처지는 대문자 E라고 생각했다. 대학생 그리고 싱글이었을 시절엔 늘 점심, 저녁으로 2주 치 약속이 잡혀있었다. 친구가 연예인이냐며 놀리기도 했다. 하숙집은 정말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밖에서 에너지를 채우는 E가 확실했던가. 하숙했던 그 시절엔 아무래도 텅 빈 방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TV를 보기 싫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까지도 외출 한 번 하면 늘 두 탕을 뛰었다. 체험수업했다가 키즈카페 가고, 문화센터 갔다가 놀이터 가고. 아무래도 그 젊은 날에 내가 가진 E 에너지를 다 소진했나 보다. 질량보전의 법칙이라고 하지 않나. 이제는 I 에너지 차례가 왔다. 요즘은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는 집에서 혼자 책 보고 드라마 보는 것이 더 편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예전처럼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나이 들면 입맛이 바뀌듯 나의 성향이 바뀌었을까. 이제껏 내내 늘 확신에 차서 결정을 하고 씩씩하게 파워워킹 느낌으로 앞으로 쭉쭉 나아가면서 살았는데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것 같다. 만사를 귀찮아한다는 사춘기아이처럼 모든 게 다 귀찮다. 결정은 그야말로 빈대떡 부치듯 번복하고 앞으로 반발짝도 내딛기 어려운 듯 망설인다. 예전이라며 이런 건 나답지 않아! 기운 내! 긍정파워! 빵이나 먹으러 가자! 했을 것이다. 발라드를 들으면 우울해지는 것 같아 댄스음악만 들을 정도였다. 그저 밝음, 밝음. 인간비타민처럼 살겠다고 굉장히 노력했던 것 같다. 문제가 있다 생각하면 진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쳤다  

댄스음악을 즐겨 듣지만 몸치입니다. 출처: 픽사베이

어디서부터였을까. 어릴 적이 생각난다. 집에 부모님 친구분들이 놀러 오시면 들릴 듯 말 듯 인사하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천생여자라며 정말 얌전하다고 하셨다. 더 어릴 적이 생각난다. 슈퍼에 가면 동네 어른들은 동생과 나를 데리고 나온 엄마께 꼭 묻는다. “딸 둘이 다야? 아들하나 낳아야지. 엄마한테 남동생 낳아달라고 해.” 할머니는 엄마에게 아들을 낳으라는 말은 일생에 한 번도 하지는 않으신 분이었지만 안방엔 유일하게 아들이었던 사촌동생의 졸업사진만 걸려있었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꼭 우리 부모님 아들 가진 사람들보다 호강시켜 드리리!’ 다짐하게 했다. ‘얌전한 천생여자는 결코 아들노릇을 할 수 없어.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해.’ 어릴 적 내 꿈은 여군이었다.(가장 강해 보이는 여자였으므로) 그 시절엔 당연한 듯했던 수많은 참견과 선입견들이 내가 원하는, 혹은 누군가 원하는 마네킹을 만들었고 그 안에 나를 구겨 넣었던 게 아닐까. 조용히 침잠하려는 모습은 유약한 것이라며 그거 아니야, 외쳤다. 그런 나를 마음 깊은 곳에 내려놓고 바닥을 박차고 올라오길 바랐다. 언제나 힘차고 단단하길 바랐다. 외강내유였달까.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깨끗한 척 지내왔지만 사실 너덜너덜한 누더기였다. 상처 가득한 어린 내가 마음 깊은 구석에서 기다렸음을 이제야 알아차린다. 자, 이리 와. 나랑 떠나자, 무인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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