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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Nov 22. 2023

무통마취의 세계가 열렸다

과자를 먹다가 갑자기 이 한쪽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거울을 보니 아래어금니 귀퉁이가 깨져있었다. 딱딱한 과자도 아니었고 뭐가 떨어져 나간 느낌도 없었는데 이럴 수가. 어렸을 적에 때웠던 이였고 때운 부분이 아닌 그냥 이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아 더욱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치과 가는 것은 미루게 되는지. 무서운 치료를 할까 무서웠고 엄청난 진료비가 나올까 두려웠다. 놔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정말 어쩔 수 없이 치과를 찾아갔다. 썩어서 약해진 이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일단 예전에 때운 부분을 다 떼어보고 신경치료까지 해야 할지 확인해 봐야 한다고 한다. 그날은 치료를 하지 않고 떨어져 나간 부분만 임시로 메꾼 채 집으로 돌아왔다. 신경치료라니.


어릴 적에 소아과보다 자주 갔던 곳이 치과였다. 치과는 내게 썩은 이를 치료해 주는 곳이기도 했지만 자존감을 채워주는 곳이기도 했다. 울지 않고 얌전히(?) 치료를 받고 나면 온갖 칭찬이 쏟아졌고, 충치를 많이 때우는 힘든 치료 후에는 그 당시 최고의 선물이라 여겨졌던 주사기를 훈장처럼 받을 수도 있었다. 치료가 끝나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멋진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그 치과가 칭찬만 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때 때운 이가 아직 멀쩡히 버텨주고 있고 그 덕분인지 아직 신경치료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신경치료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실체 없는 두려움이 날 사로잡았다. 마취를 하고 치료했던 적은 많다. 잇몸에 주삿바늘이 찔리고 약이 들어오던 경험. 무섭고 아프고 기분 나쁜,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경험이었다. 치과 가기 싫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남편은 별거 아닐 거라고 했다. 마취를 하는 것은 별일이 틀림없다며 단호하게 남편의 위로를 밀어냈다. 어린 시절 용감하게 치과 문을 열었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저 의자에 앉으며 잔뜩 긴장하게 된다. 출처: 픽사베이


띠링. 여유님, 00일 10시 30분에 예약입니다. 친절한 안내문자가 무시무시한 유령의 집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잔뜩 겁을 먹고 예약날 치과를 갔는데 평소에 눈에 띄지 않던 홍보문구가 있었다. '무. 통. 마. 취' 검진하며 다니는 동안 전혀 몰랐는데 저 날은 어지간히 들어가기 싫어 걸음마저 늦추다 눈에 띈 것 같다. ‘마취를 하는데 무통이라고? 저게 뭐지? ’ 궁금함과 함께 작은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른다. 내 이를 살펴보시던 선생님은 치료를 시작했다. "마취할게요. 조금 불편합니다."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삿바늘이 언제 들어오려나 생각하며 긴장하니 호흡마저 참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잇몸에 느껴지는 것은 얇디얇은 바늘이었다. 그마저도 마취크림을 바른 후에 들어와 고통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주 미세한 불편감만 들었다. 떼어낼 것이 꽤 깊어서 2차 마취도 한다고 했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몸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오, 마취가 이런 거였어? 이게 끝이야?' 예방주사 맞기 전에 긴장했다가 맞고 나면 별거 아니라고 느끼듯 예상과 다르게 아주 짧은 순간 잠깐의 뻐근함만 남긴 채 마취가 끝나있었다. 그 이후는 당연히 아무런 감각 없이 무사히 치료가 끝났고 신경치료는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다음 진료 때 보자고 하셨다. 세상에, 무통마취는 정말 새로운 세계로구나. 이제 치과치료를 두려워할 일이 없겠구나!






과거에는 수술 시 마취하는 기술이 없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수술을 하다 고통에 몸서리치다 쇼크사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고 한다. 통증이 우리 몸에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통이든 치통이든 생리통이든 너무 참지만 말고 진통제를 먹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진통제도 무통마취도 진보한 의학기술이고 그 엄청난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인간에게 올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남김없이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고통을 미리 제거할 수 있어서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아주 작은 통증을 겪게 되어도 극심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혹은 고통을 제거할 수 있어서 극한의 고통이 가해지고 있는데도 그걸 느낄 수 없어 그 상태가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 보면 '소마'라는 약이 나온다. '소마'는 원할 때면 언제든 복용할 수 있도록 지급이 되는데 부작용 없는 마약 같은 존재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골치 아픈 고민거리가 있거나 머리 아픈 결정사항이 생기면 '소마'를 복용하고 그 즉시 모든 고뇌들이 사라지면서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가 된다. 모든 근심과 고민이 제거된 상태를 늘 유지하는 것이 행복일까? 모든 생각들을 멈춰주는 '소마'는 사람을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고 심지어 제자리걸음도 하지 않는 얼음 상태로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시간만 흘러가는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멈추어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거 글로 써볼까?' 하면서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많은 일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고민하고 따져 생각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 하나도 찾다 보면 이유가 있었고 뒤지다 보면 역사가 있었다. 생각하는 삶을 이어가고 싶다. 글 쓰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다.

그래도 치과치료는 무통마취를 강력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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