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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Aug 10. 2024

커피 맛을 모르지만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셔요

커피 맛을 잘 모른다. 에스프레소바가 유행한 지 꽤 됐지만 얼마 전에서야 처음 가봤다. 눈이 번쩍 뜨인다. 또 갔다. 오랜 친구를 데려가고, 동네 언니들과 함께 갔다. 커피 맛은 모르지만 여러 메뉴를 하나씩 먹어보는 재미가 있다. 에스프레소 위에 크림이 올라가고 우유 거품이 올라가기도 한다. 달달한 생크림이 올라가는 메뉴도 좋다. 오렌지와 레몬 슬러시가 올라간 생소한 메뉴도 있다. 커피 맛도 모르면서 자꾸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에 여러 잔을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식후에 카페에 가면 늘 고민이 많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배가 불러서 고민된다. 깔끔한 커피로 마무리하고 싶지만 달콤한 커피가 생각난다. 어떤 카페에는 반반 메뉴가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노와 라테, 반반. 고민을 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에스프레소 바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것도 마시고, 저것도 마시면 된다. 한 잔 마시면서 아이 학원 레벨테스트 결과가 만족스럽다고 얘기했다가, 한 잔 마시면서 어제 간 맛집을 소개하며 가는 길을 설명한다. 한 잔 더 마시며 최근에 시작한 운동 이야기에 열광한다. 한 잔 마실 때마다 마치 막이 바뀌듯 대화 소재가 바뀐다.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 같은 느낌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가 꽉꽉 들어차서 시간의 농도가 아주 짙어진다. 어머, 이제 아이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네. 우리 한 잔만 더 마시고 가자. 딱 한 잔만 더 하자는 애주가의 마음을 이해한다. 집 앞까지 왔다가 다시 한 바퀴 돌고 오자는 연인의 애틋함이 기억난다.

다들 빈 잔을 모아 찍더라.

한창 이야기하고 있는데 직장인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주문한다. 금방 나오는 에스프레소를 후딱 한 잔 털어 넣더니 가게를 나선다. 5분이나 걸렸으려나. 마치 시간 내에 임무를 수행하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미션성공! 프랑스와 포르투갈에서는 에스프레소(espresso)를 expresso라고 표기한다고 하는데 영어로 빠르다는 express와 거의 같다. 요즘 에스프레소바가 인기인 것은 빠름 빠름의 대명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작은 잔에 일반 커피양보다 훨씬 적게 들어있어 농도가 짙은 응축된 원액을 먹는 듯하지만 빠른 시간에 적은 양을 추출해서 오히려 카페인양은 적다고 한다. 여러 잔 마신 날도 수면에 큰 악영향이 없는 듯했는데 적은 카페인 덕분인가 생각한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셔서 한 잔 주문하시고는 자리에 앉으신다. 천천히 음미하며 드시고는 핸드폰도 꺼내지 않고 잠시 무언가를 응시하시는데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잠시 후 짐을 챙겨 나가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동이 단정해 보인다. 할 일이 있어 시간을 길게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커피를 즐기기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 이곳이 적당해 보인다. 나도 에스프레소바를 즐겨 다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이번에는 유모차를 밀며 젊은 아빠가 들어온다. 작은 잔에 빠르게 나오는 에스프레소를 받아 유모차 옆에 달린 컵 캐리어에 야무지게 넣는다.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유모차에 탄 아이가 마침 잠이 들어서 커피 한 잔 즐기려고 카페에 들어갔다. 아이가 태어난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참 뜨거운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야심 차게 뜨거운 라테를 주문했다. 호로록 첫 입을 마시고 한 김 식기를 기다리는데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불안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미처 커피가 식기도 전에 아이가 깨버렸다. 어른들은 흔들림이 없는 침대를 선호하는데 아이들은 흔들림이 없으면 왜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걸까. 뜨거운 커피라 걱정되어 캐리어에 넣지도 못하고 한 손에 들고 팔꿈치로 유모차를 밀며 카페를 나갔다. 지금이야 웃으며 기억하지만 그땐 커피도 한 잔 못 마시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명하게 에스프레소를 선택한 젊은 아빠에게 내공이 느껴진다.




요즘 힘든 일을 겹쳐 겪고 있는 지인을 만났다. 쌉쌀하고 진한 에스프레소를 크림과 설탕으로 중화시켜 주는 메뉴와 바닥에 깔린 커피 위에 상큼한 오렌지 슬러시가 올려진 메뉴를 시켰다. 그동안 벌어진 힘든 사연을 한 잔에 꾹꾹 눌러 담는다. 언제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그녀는 스스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먼저 돌아본다. 모두 남 탓으로 돌리며 화내도 이해할 수 있는데 자꾸만 겸허해지는 그녀 때문에 눈앞이 흐려진다. 진한 커피를 넘기며 눈물을 참아보지만 이미 출격한 눈물을 이길 수가 없어 결국 눈가를 훔친다. 양 적은 커피는 식도를 따라 빠르게도 넘어간다. 그녀의 슬픔도 빠르게 지나기를 바란다. 힘든 일이 응축된 것 같은 이번 시련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힘든 일이 없었으면 한다. 차갑고 새콤한 과일 슬러시와 함께 어우러진 커피는 처음맛본다. 입맛에 감도는 낯선 맛이 싫지 않다. 온통 안 좋은 상황 틈 속에서 좋은 점을 끄집어낸 그녀를 응원한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고운 마음 씀씀이를 배우고 싶다.

커피를 마시는 호흡이 짧아서인지 다른 카페보다 다른 사람들이 눈에 더 들어온다. 짧은 시간에 넘어가버려도 혀 끝에는 진한 맛이 오래 맴도는 것처럼 앞사람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남아 한참 동안 가시질 않는다. 같은 커피지만 새롭게 접한 에스프레소 매력에 빠졌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고 괜스레 이야기 여운이 길어지는 에스프레소바에 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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