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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Aug 14. 2024

불 안 쓰고 한 끼 뚝딱!

더운 여름에 주방에 머무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우리 집의 경우 구조상 거실 에어컨 바람이 부엌까지 잘 전달되지 않아 가만히 있어도 일단 덥다. 그리고 썰고 볶고 끓이다 보면 그 공간의 온도는 점점 올라간다. 기록적인 폭염의 기세가 아직 꺾이지 않은 이번 여름이지만 참 다행스러운 것은 아이가 개학을 했다는 것이다. 겨울에 석면공사가 예정된 학교가 개학일정을 앞당긴 것이다. 점심 한 끼 덜 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 이른 개학 후에 다시금 깨달았다. 이런 좋은 기회를 최대한 잘 살려야 한다. 나의 점심은 최대한 불은 안 쓰고 하고 싶다. 건너뛰고 싶지만 그러기엔 배가 고프다. 대충 인스턴트를 먹고 라면을 먹는 것도 입맛이 바뀌었는지 금방 물렸다. 더운 여름에 먹는 것으로 건강을 챙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열심히 궁리해서 어제도, 오늘도 불을 쓰지 않고 끼니를 때우고 있다. 아이도 좋아하는 메뉴라 저녁에 아이에게도 차려줄 수 있다면 하루종일 실제 집안 온도가 1-2도는 거뜬히 내려간 느낌이다. 내 마음의 온도는 그 이상으로 내려간 것은 당연하다.




첫 번째 추천하는 메뉴는 묵사발이다. 시원하면서도 야채도 함께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인스턴트는 지양하고 싶지만 육수까지 끓일 정성은 더위에 증발된 듯하다. 시판 냉면육수만 있으면 된다. 오이와 집에 있던 샐러드용 로메인을 뜯어 넣었다.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깨를 갈아 넣는다. 김은 육수를 좀 어지럽게 만들지만 빼먹을 수 없는 필수 재료다. 이렇게 간단하게 근사한 한 끼가 차려진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활의 8할은 먹는 것이었다. 중학교 3년 내내 야금야금 모아둔 용돈을 고3 수험생활동안 간식비로 썼다. 저녁 급식을 먹고 나면 야간 자율학습 시간 전까지 학교 밖으로 외출이 허용되었다. 월드컵 경기를 봤던 학교 앞 빵집에서 빵을 샀고, 그때 유행이었던 천연재료로 만들어 주는 아이스크림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분식집에서 떡꼬치와 피카추 돈가스를 사 먹었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겨울에는 학교 앞 서점에서 팔던 베지밀과 호빵을 샀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던 것인지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자주 배가 고팠고, 먹고 싶은 것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렇게 먹고도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가면 또 먹었다. 그날의 신문을 훑어보며 간식을 먹는 것이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루틴이었다. 일주일에 하루는 늘 같은 메뉴였다. 바로 묵사발. 아파트 안에 서는 장터에서 파는 묵사발을 정말 좋아했다. 여름에는 얼음까지 동동 띄워 시원하게 먹었고 겨울에는 따듯하게 데워 주셨다. 짭조름한 육수와 밍밍한 묵은 참 잘 어울린다. 아삭아삭 오이와 쌉쌀한 끝맛의 상추. 거기에 김치까지 더해지면 그보다 완벽한 조합이 있을까 싶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면 자기 전에 보내는 그 시간이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지치지 않게 나를 잘 지켜주었다. 묵사발을 먹으면 늘 그때가 떠오른다. 엄마, 아빠와 대화를 나누던 시간들, 신문의 종이 냄새, 배를 채우며 느꼈던 충만함까지.

두 번째 메뉴는 콩국수다. 시판 콩물이 많이 없었는데 요즘은 예전보다 확실히 쉽게 구할 수 있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사람들이 콩국수를 더욱 좋아하게 된 걸까. 꾸덕꾸덕한 스타일의 콩물을 좋아하는데 집 앞 마트에 있는 두부집에서 콩물을 팔길래 사보았다. 꾸덕꾸덕한 스타일의 콩물이 참 마음에 든다. 불을 안 쓰려면 어떤 면을 골라야 할까. 다이어트를 위한 면을 활용한다. 해초면도 있고, 두부면, 곤약면도 있다. 두부면이 가장 일반 소면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콩국수에 두부면은 단백질만 섭취하게 되는 것 같아 곤약면을 선택했다. 오이를 올리고 토마토가 없어 자두를 대신 올린다. 오이는 스낵 오이를 선택했다. 작고 단단한 미니 오이인데 가운데 물컹한 심지가 적고 길이도 적당해 준비를 한결 간단하게 해 준다. 간단하게 불 하나 안 쓰고 이렇게 건강하고 든든한 한 끼가 완성됐다.

나의 첫 콩국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파트 근처 상가 지하에 몇몇 식당이 있었다. 그중 한 식당에서 여름에 콩국수를 팔았다. 회색에 여러 조각들이 박힌 시멘트로 된 계단을 내려가야 했는데 끝부분은 금속으로 마무리되어있었다. 얼마 전에 카페에 갔는데 옛날 건물을 활용한 곳이라 오랜만에 회색 시멘트 계단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시멘트 덕분인지 지하라서 인지 그곳에 들어서면 늘 서늘했던 것 같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으면 아주머니가 은색 사발에 콩국수를 내주셨다. 별로 맛있지는 않았다. 엄마가 식탁 한쪽에 있던 소금 통을 열어주시며 소금을 넣으라고 하셨는데, 맛없던 콩국수가 갑자기 마법처럼 맛있어졌다. 그곳의 콩국수는 맑은 느낌이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꾸덕꾸덕한 콩물이 요즘 유행인 것 같다. 면은 얼마 안 먹고 숟가락으로 자꾸만 자꾸만 콩국을 떠먹었다. 다 먹고 엄마와 손잡고 올라오던 그 계단, 배가 빵빵해져 든든해진 기분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콩국수를 먹으면 어린 시절 살던 아파트 단지가 생각난다. 단지 내에서야 이사를 몇 번 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살던 곳이라 어릴 적 추억이 모두 그곳에 있다. 동생을 태우고 세발자전거로 복도를 누비던 기억,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친구들과 주차장에서 '불났니'라는 놀이하던 기억. 친구 누나가 만들어 줬다던 상자에 가득 담긴 사탕을 받았던 놀이터, 동생과 손잡고 가서 사 왔던 시장의 떡볶이와 튀김, 책 빌려주던 책방에서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왔던 만화책, 아직도 그곳에 있는 치과에서 치료받으며 울지 않았다고 받았던 칭찬과 주사기 선물까지. 콩국수 한 그릇 먹었을 뿐인데 추억과 기억이 면발에 주렁주렁 달려 끌려 올라온다. 음식은 참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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