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왜 결정적일 때 나오는 걸까. 잘 나가던 경기는 한순간에 뒤집혀 버린다. 선수는 엄청난 죄를 지은 표정으로 어깨는 한없이 처져 곧 땅에 닿을 것만 같다. 9회 초에서 실수로 역전을 허용했으니 선수는 또 얼마나 자책할까 싶어 안쓰럽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끝난다면 오늘의 경기 결과를 두고 선수 탓을 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야구를 보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9회 말 2 아웃에서 얼마나 많은 역전 드라마가 펼쳐졌는가. 풀이 죽은 선수에게 동료들은 위로를 건네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용기를 북돋는다.
"괜찮아, 괜찮아. 뒤집을 수 있어!"
그리고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 9회 말 2 아웃에서 그림 같은 끝내기 안타로 결국 다시 뒤집어 승리했다. 실책을 범했던 선수는 누구보다 빨리 달려 나가 안타를 친 선수에게 매달려 고마움을 표시하고 안도한다. 승리를 애타게 바랐던 팬들과 실책을 범한 선수 모두에게 그날의 승리는 얼마나 짜릿하게 기억될까. 이겨서 참 다행이다. 비단 야구뿐이 아니다. 올림픽에서도 얼마나 많이 봤는지 셀 수도 없다. 체급도 다른데 연장전 끝에 몇 초 안 남기고 승점을 올려 짜릿한 승리를 보여준 유도, 아슬아슬하게 겨우 동점을 만들어 조마조마했는데 슛오프에 가서는 시원하게 승부를 냈던 양궁.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속담이 이처럼 꼭 맞는 때가 있을까.
지금 사는 곳은 엄청난 학군지가 아닌 탓인지 학구열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4학년이 되자 슬슬 열기가 전달되고 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영어, 수학 학원을 안 다니는 아이를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아이는 아직 수학 학원에 다니지 않는데 집에서 하는 수학 공부가 점점 버거웠다. 남편은 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제 학원에 갈 때가 됐다고 했다. 수학 학원을 알아보는데 영 시간이 맞지 않았다. 논술 학원이 중간에 떡하니 버텨 이리저리 시간표를 짜맞추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기 중이었던 논술학원을 최근에 연락을 받고 다니는 중이다. 대기가 길다더니 예상보다 금방 연락이 오길래 이제 인기가 떨어졌나 보다 넘겨짚었다. 그것이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이 애매한 반이라 차례가 빨리 왔던 모양이다. 영어와 수학을 병행하려면 월화수목금 빡빡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가능하다. 그런 와중에 논술학원 스케줄이 길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논술학원은 포기해야 하는 선택지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늦은 시작이라면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키가 논술이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다. 영어유치원을 다니며 영어를 공부하고 미취학부터 사고력 수학을 공부했던 아이들이 쌓아온 시간과 노력을 한 순간에 뒤집기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풍문을 들었다. 영어를 잘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수학을 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어를 잘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 타고나야 한다는 것보다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의 투입 없이는 실력을 향상하기 어렵다는 말로 해석했다. 그 말에 불안한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남들보다 영어와 수학을 느리게 시작했다면 논술에 매진해서 그동안 뒤떨어졌던 부분만이라도 채우기를 바랐다. 논술학원을 포기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다. 심지어는 뒤떨어졌던 부분을 채우고 나아가 역전도 한 번 노려볼 수 있을까 하는 놀부 심보가 없었다고는 말 못 한다.
이런 엄마 욕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논술학원을 재밌게 다니고 있다. 책 읽고 글 한 편을 써가는 것이 숙제인데 발표하면 친구들에게 무더기 칭찬을 듣는 시간이 있다. 비판과 지적이 금지되어 있다. 칭찬 샤워에 아이의 자존감이 커지고 잘 쓰고 싶은 욕심 또한 커지는 것이 숙제하는 모습에서 느껴진다. 나그네의 외투 이야기처럼 햇살이 효과가 확실하다. 바람을 아무리 불어도 벗겨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꽁꽁 감싸던 나그네의 외투가 햇살이 비추자 금세 벗어던진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내가 발표를 듣고 글을 보았다면 부족한 점을 지적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맞춤법을 좀 더 신경 쓰고 목소리를 좀 더 또박또박하면 좋을 텐데 생각이 들겠지. 집에서 고치면 밖에서 아이가 좀 더 멋진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이겠지만 그 바람에 아이는 점점 움츠러들 것이다. 아이는 처음에 공책의 반도 채우기 어려워했고 글씨도 예쁜 축에 들지 못했다. 어릴 적에 더 많이 글씨 연습을 시키지 않은 탓을 이제야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숙제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뒤돌아 몰래 내쉴 때도 많았다. 확실히 아이는 처음보다 성장했다. 단번에 술술 써내려 가진 않아도 예전보다 글 쓰는 양이 늘었다. 자주 한 장을 꽉 채우기도 하고 글씨도 몰라보게 예뻐졌다. 아이는 내 한숨이 닿지 않는 곳에서 쑥쑥 자라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이미 승부가 결정된 것처럼 구는 것은 내가 아닌지 반성한다.
아이는 이제 글에 자신이 붙었는지 이번 숙제를 끝내고는 나에게 내민다.
"엄마, 이걸 소재로 글 써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가득 서려 있다. 그런 손을 내가 어찌 뿌리칠 수가 있을까. 안 그래도 글감이 없어 고민이었는데 잘됐다고 반색하며 글을 받았다. 아쉬운 것은 글을 보자마자 참 잘 썼다고, 예전보다 많이 성장했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모르게 또 맞춤법이 맞는지 훑고 만 그 순간이다. 9회 말 2 아웃 상황에서 역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믿음과 끝까지 응원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한 응원을 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절로 생길 테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엄마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이제부터 엄마의 일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