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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Jan 17. 2024

쿨톤과 웜톤사이

"이 색 테스트 해볼 수 있을까요?"

"고객님은 웜톤이신 것 같아요. 그러면 핑크계열보다는 코랄계열이 더 잘 어울리실 거예요."

"아, 맞아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일단 이거 로즈핑크 한 번 해볼 수 있을까요."

내게 잘 어울리는 것 vs 내가 바르고 싶은 것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 매장 직원은 아무리 봐도 웜톤인 손님한테 쿨톤의 립스틱을 판매하기가 싫은 듯하다. 프로의식이 있는 훌륭한 판매사원임을 인정해 드려야겠다. 웜톤인 거야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래도 난 핑크가 바르고 싶은데. 핑크립스틱은 온라인으로 사야겠다. 날 가로막는 이가 없을 테니.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면 세상 고민이 반은 줄어들 것 같다. 주변을 둘러봐도 일치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잘하게 된 사람과 잘하는 것의 성과와 결과물이 만족스러워서 좋아하게 된 사람은 보았다. 보통 그 일을 오래 하려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고 한다. 좋아서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고. 그런 분야가 자신의 전문분야가 될 수 있다고. 정말 그럴까? 고등학교 때 문과였지만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다. 수험생활 내내 수학과 과학 공부에 매진했지만 결국 수능시험에서 내 발목을 잡은 것은 수학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한 흥미는 대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복수전공 필수 과목 중에 선형대수학이 있길래 다른 선택지를 제치고 날름 신청했다. 수업시간 내내 재밌었고 열심히 했지만 시험을 보며 좌절했다. 그 결과 C+이 나왔지만 차마 재수강도 할 수 없어서 취준생 시절 내내 눈총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하고 싶다. 같은 노력을 들인다면 더 그럴 싸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고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서에 관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좋아하는 책은 소설과 에세이이다. 소설과 에세이 읽기는 내게 그저 즐거움이라 오래도록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을 지속하면 무엇을 잘하게 될까? 매년 말에 한 해동안 읽은 책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매년 1백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소설과 에세이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편독을 피하고자 독서모임을 하며 다양한 책을 읽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비율을 보면 소설과 에세이가 많긴 하다. 러닝머신 위에서 가만히 있으면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독서를 하다 보면 소설과 에세이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책을 적게 읽지 않았는데 조금씩이라도 내가 잘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을 읽다 보면 독서에 관한 많은 지론들을 만난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독서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독서는 힘들게 하는 겁니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집니다. (중략) 독서를 일처럼 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계속 공략해 나가다 보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공략할 때 수월하게 넘나드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최재천의 공부』 최재천


이럴 수가. 나에게 즐거움이었던 독서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었던가. 아주 충격적이었고 그간의 독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책을 적게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책 많이 읽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책 많이 읽는 사람은 깊은 사고를 통해 문제나 상황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인데 스스로 그런 모습은 별로 없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을 하며 책이든 사는 이야기든 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띈다. 깊은 사고도 통찰력도 많이 부족한 것 같아 독서모임에 나가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도 있다. 가만 생각하니 책은 많이 읽어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책을 거들떠보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필사를 한 지 3년이 넘었다. 예전보다는 책을 좀 더 기억하고 성찰하는 시간도 생긴 것 같다. 책을 다시 읽지 않아도 필사노트를 넘겨보며 나를 돌아볼 수 있어 좋다. 그렇지만 나의 사고가 깊고 넓어졌는가에 대해 따져보면 나아졌는지 확신이 없다.

얼마 전에 이런 나의 고민을 나누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원하는 넓고 깊은 시야는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통찰력이 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은 다들 그 분야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고 관련된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었다. 소설과 에세이를 읽는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팥을 심고 콩이 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럼 소설과 에세이를 읽으며 얻은 것은 과연 재미뿐이었을까. 나의 독서는 그저 눈만 나빠지는 독서이지 참다운 독서가 아니었던 걸까. 소설과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에서 답을 찾았다. 소설과 에세이 속에서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 끝도 없이 다양하게 사는 모습을 작가의 시선으로 듣는 것이 재미있다. 스스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티 나지 않게 잘 숨기고 있다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책 속의 수많은 사람들 이야기를 접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같은 상황에서 나와 다른 작가의 시선에 그럴 수도 있구나, 저럴 수도 있구나 감탄한다. 그렇게 사람에 대한 시야가 넓고 깊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알지 못하고 애먼 책을 읽어서 깊이가 없다며 경제경영철학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닦달했다. 잘 읽히는 재밌는 책만 읽으니 통찰력이 안 생긴다며 억지로 어려운 책을 찾아 읽으려 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에 고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원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원하는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을 원하는지. 그러면 선택이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나의 피부톤과 어울리는 립스틱을 발라서 더 예뻐 보이고 싶은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색을 바르며 스스로 기분을 낼지. 어느 쪽이든 원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만족도가 높을 것이다. ‘발그레한 딸기인 척‘ 귀여운 이름 붙은 립스틱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분홍립스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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