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그만 말하고 밥을 어서 먹어볼까?"
아침에 학원시간 맞추려면 빠듯한데 어제 줄넘기 학원에서 있었던 무용담을 말하느라 아이는 바쁘다. 이중 뛰기를 연속으로 몇 개나 했는지 설명하는데 왜 이리 미사여구가 많이 붙는가. 엄마의 놀람과 칭찬을 받아먹으려고 눈이 초롱초롱한데 엄마는 찬물을 끼얹는다. 그래도 면전에 끼얹기는 미안하니 어금니는 깨물어도 억지 미소라도 띄우며 말을 건네본다.
"말 좀 그만하고 먹어!"라는 말이 목에서 가랑가랑 하지만 번뜩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서 옆에서 종알거리고 있는 나에게 질문에 답은 안 하고 "엄마, 말 좀 그만해." 한마디 하는 상상. 박카스 광고였던가, 엄마의 말에는 대꾸도 안 하고 무표정으로 핸드폰만 들여보다가 친구를 만나니 해사한 만면에 환한 미소를 장착하고 뒤도 보지 않고 발랄하게 뛰어가던 여중생. 그래, 내가 이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무한한 게 아니다. 물론 이런 따스한 마음은 보통 아이가 집에 없는 시간에 커피를 여유롭게 마시다 보면 떠오른다. 띠띠띠띠, 도어록을 열고 들어와 집안 곳곳에 외투허물, 가방허물들이 뿌려지면 그 마음도 같이 허공으로 증발한다.
아이를 데리고 마트를 가는 길에 같은 라인 할머니를 마주쳤다. 연세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거동이 불편하시다. 늘 곁에 있는 따님은 자녀분이 회사원 같아 보이니 적어도 50대 이상이실 듯싶다. 집 앞에 나올 때도 동네를 산책할 때도 택시를 타고 이동하실 때도 늘 두 분은 함께다. 내가 걸음이 느린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가는 길을 재촉할 때 그분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이보다도 느린 어머니를 뒤에서 한없이 기다리신다. 언제부터 그분은 어머니와 늘 함께하셨을까.
치매가 되신 아버지를 돌보는 한 언니는 반복되는 이상 행동들에 화를 냈다가 미안해서 울었다가를 반복한다고 했다. 문제는 앞으로 증세가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만 난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한다. 자다가도 갑자기 집에서 뛰쳐나가서 24시간 함께하고 방문을 밖에서 잠가야 한다는 앞선 경험을 들으며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평범한 인생은 이제 끝이라는 시한부 선언을 받은 것 같은 막막한 기분이라고 전했다.
아는 분의 시아버님은 요양병원은 절대 갈 수 없으니 아들과 며느리 내외에게 당장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놓으라고 하셨다는데, 자격증 따는 게 대수겠는가. 그다음이 문제지. 자식을 키워냈으니 나의 마지막 삶을 너희가 키워야 한다는 마음이신 걸까.
백온유 작가의 소설'페퍼민트'에는 준비되지 않은 엄마의 돌봄을 몇 년째하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는 중학교 때 갑작스럽게 엄마의 돌봄을 마주하게 되었다. 정성스럽게 돌보면 엄마가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돌봄을 계속한다.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마음을 이제는 돌봄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으니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온 맘을 다한다. 하지만 아빠와 딸은 곧 돌봄에 끝이 없다는 사실을 맞닥뜨리고 엄마의 돌봄 외에 어떤 미래도 그려지지 않는 현실에 지쳐간다.
"이런 걸 365일 해야 하다면, 나는 마음을 다해 할 수 있어."
소파에 앉아 설거지하는 해원의 뒷모습을 보니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이 365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
생애 주기 속에서 길든 짧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통과하게 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병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전력으로 회피한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다가 어느 날 예고 없이 그날이 도래하면 신발을 뺏긴 채로 한 겨울 거리에 내몰린 아이처럼 아연해져 떨게 될 것이다. 『페퍼민트』백온유. 작가의 말 중에서.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중장년들이 물리적으로 자신들의 부모님을 돌보고 있다면 노령화사회에 살고 있는 청년들은 경제적으로 누군가의 부모님을 돌보게 될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돌봄은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 인구가 점점 줄고 수명은 늘면서 이제 우리는 돌봄의 그늘에서 잠시도 벗어나기 어려워졌다. 돌봄으로 자라나 돌봄으로 끝나는 돌고 도는 인생이구나. 그것이 회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되어버린 시대다. 돌봄이 코 앞에 와있다. 으악, 너무 가까워 곧 부딪힐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