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입을 행복한 마음을 다려요.
빨래를 하기 전에 나는 꼭 주머니부터 뒤진다.
이건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인데, 처음엔 엄마가 하던 걸 보고 자라서이고, 그 후엔 몇 번 실수한 뒤에 철저히 습득이 되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휴지 한 장이 세탁기 안에서 형체를 잃고 하얀 눈처럼 온옷에 달라붙었을 때의 당혹감.
조그마한 사탕이 녹아 아이의 바지 속을 끈적하게 만들었을 때의 허탈함.
그 작은 실수 하나가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 결과를 낳는지 몸으로 배운 후부터 말이다.
세탁기 앞에 서면, 꼭 주머니를 천천히 뒤진다.
거기엔 늘 뭔가가 있다.
구겨진 영수증, 까먹고 빈 사탕껍질, 쓰다 망쳐 구겨 넣은 포스트잇 한 장.
어쩌면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이지만, 그걸 손끝으로 꺼내며 ‘이 옷을 입고 뭘 했더라?’ 되새기곤 한다.
내 하루가, 그렇게 주머니 속에서 남겨진다.
그렇다고 그 옷이 쓰레기가 되는 건 아니다.
그 옷은 여전히 내가 아끼는 옷이다.
구겨졌다고, 얼룩이 있다고, 잠깐 땀에 절었다고 해서
그 옷을 버릴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그저 물을 받고, 세제를 넣고, 온기를 담은 물속에 옷을 담가 얼룩과 먼지와 땀이 씻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세탁기 전원 버튼을 누른다.
말끔히 헹궈졌을 때 햇빛 아래 널면, 그 옷은 다시 나를 위한 새 옷이 된다.
단정하고 깨끗하게, 내일의 나를 위해 준비된.
요즘 나는 자주 우울한 글을 쓴다.
밤이 깊어질수록 새벽이 밝아올수록 마음속에 잔잔하게 깔린 감정들이 문장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외롭고, 두렵고, 애매하게 아픈 마음들.
어쩌면 보기엔 무척이나 어두운 문장일지 모른다.
그 글만 읽는 사람은 내 삶이 온통 우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주머니에 구겨진 휴지가 있다고 해서
그 옷이 쓰레기가 아닌 것처럼,
내가 우울한 글을 쓴다고 내 삶이 우울한 건 아니라고.
주머니에서 쓰레기가 나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주머니에 쓰레기 넣고 다니는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듯이,
이혼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혼한 사람”,
우울한 자식이 있다고 해서 “우울한 자식을 둔 사람”이라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주머니 속에 티끌이든 쓰레기든 메모지든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 안에는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찐득한 사탕일 수도 있고, 누가 봐도 모를 ㅡ툭툭 털어버리면 그만인 ㅡ 먼지 한 톨일 수도 있다.
무심코 넣어두고 잊은 감정처럼 오래도록 묵은 것들도 있으리라.
그걸 꺼내보는 일은 조금은 민망하고, 때로는 서글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니다.
나는 바란다.
우리가 서로의 주머니에서 새로 발견한, 그러나 이제는 꺼내어 보내야 하는 것들을 서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기를.
힘내라는 말 대신, “나도 이거 있었어. 빨래할 때 조금 애먹었지 뭐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아픔을, 슬며시 나눌 수 있기를.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빨래 아닐까.
같이 말리고, 같이 개어주는 마음.
삶이라는 옷을, 다시 입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정성.
삶도 옷처럼
세탁하고 털고, 바람에 말리며
다시 입을 준비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구겨지고 얼룩졌더라도
그 안에 내가 있었고, 견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내 마음의 주머니를 뒤적인다.
쓸모를 다한 것들은 웃으며 꺼내어 보내고,
내일 입을 행복한 마음들을 다려둔다.
능동적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말이다.
햇살 좋은 날, 바람 부는 베란다에
조용히 널린 삶들처럼,
우리 모두의 하루도 그렇게
조금씩 보송보송 말라가고, 다시 준비되고 있는 중이니까.
버릴 것들은 버리고,
남은 것들은 고이 접어
내일도 나답게 살아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니,
조금은 엉성해도 괜찮다.
조금은 구겨져도 괜찮다.
그저 서로의 주머니를 마주 보며
“나도 이랬어” 하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