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

매 순간이 처음인 우리에게

by 여름둘겨울둘


아침에 출근하는데 설악산이 보였다.
단풍 든 산자락으로 햇빛이 비추는데 그 위로 구름들이 띄엄띄엄 유유히 흘러가면서
그 구름 그림자들이 알록달록 산에 얼룩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구름도 흘러가고... 그림자도 흘러가고...(내 마음도 흘러가고... 내 발길도 에버랜드로 가고 싶고... 앗. 이럼 무단이탈, 사유서감)



그 아래 숲 속엔 누가 살까?
다람쥐, 토끼, 고라니가 있을까?
고 작은 아이들이 커다란 그림자 아래 있으면
'오늘 날씨 흐리네.'
생각할까?
조금 있으면 흘러갈 구름이고
햇빛 비칠 텐데
오늘 날씨 흐리다 생각하고는
일정 다 포기하고 새끼들과 쉬려나?

'가서.. 그거 구름 그림자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오늘 할 일 미루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늘 그렇듯... 말도 안 되는 나만의 상상과 함께 출근길을 그렇게 달렸다.
그러면서 나도 하나의 구름 그림자를 지나
햇빛 비치는 길을 또 금세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학교 도착할 무렵 산을 올려다보며 혼자 또 생각했다.
'쟤네들도 다 알겠지, 겪어보면..... 또 많이 겪어봤겠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그러면서 또 생각한다.

'겪어보지 않아서 몰랐던 것들이 매일 매 순간 밀려오는 게 인생이지.'


결혼하기 전.. 생기 넘치던 시절(?)
내가 참 좋아하던 선배 언니가 있었다.
언니네 학교가 연구학교로 지정됐었고, 나한테 와서 일해줄 수 있냐고 해서.. 승낙했고.
초빙 서류 거치고 나서 본 학교를 떠나 언니네 학교로 발령이 나서 그렇게.. 언니랑 딱 1년 같이 근무한 적 있었다.
멀리서만 보던 언니는 참 능력 있고, 밝고, 진취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난 그런 언니가 롤모델이라고 할 정도로 존경했고, 지금도 교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언니를 닮고 싶었던 내 모습이 나오기도 하는데..
근데 그 당시에 참 이해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어느 날은 검정 슈트 옆구리에 흙이 잔뜩 묻어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또 앞섶에 밥풀이 덕지덕지 붙어있기도 했고
지각도 가끔...

언니 기분 나쁠까 봐,,, 또는 그게 어떤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언니 이게 뭐예요?" 하면서 묻지 못하다 언니랑 1년을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옆구리에 묻은 흙은 흐린 날 아이 손잡고 어린이집 데려다주다가 아이 걸음걸이가 늦으니, 언니도 지각할까 봐 급하게 업어 데려다주면서 아이 신발에 묻었던 흙이 고스란히 언니 옷에 묻었던 거였고
아침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아이 밥은 먹여야 되니, 또 전쟁 같은 아침을 보내다가 밥풀이 붙었는지도 모르고 학교에 온 거였고
뭐 다른 것들도 다.... 육아의 고충이 드러났던 모습이었던 거다.

어떤 날은 밤에 전화를 해서
나 이렇게 못 살겠다고... 내일 학교 나가서 출근했을 때 무슨 소문이 들려도 그러려니 하라며...
울기도 했었다.
남편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었고,, 아마 나한테 전화했을 땐 이혼이라도 불사하고 싶었던 거 같은데..
그 답답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서.. 결혼도 하지 않은 저한테 그렇게 울며 전화를 했던 거였다.
아마 부모님한테도... 친구한테도.. 말하기 힘들었을 테다.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하는 생각 하면서도...
언니가 우는 게 아파서... 토닥이며 이야기를 들어주었었는데.. 위로는 해줄 수 없었다.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고, 내 이후의 인생은 내가 의도하는 대로 잘 흘러갈 것이고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거란 말도 안 되는 자만심에 쌓여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막 털어놓고 싶은.,. 그런 순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언니만큼일지 모르지만... 많이 힘들었을 때... 말이다.


후에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등바등 살다 보니...
데자뷔처럼... 언니의 과거 모습들이 현재의 내게서 문득문득 느껴지는 순간들이 왔다.
그런 순간엔 여지없이 멈추게 됐다. 호흡도 생각도 움직임도..

그리고 주변을 더 섬세하게 너그럽게 바라보게 되는 거다.
'그랬었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래도 매일이 새롭다. 매일이 처음이고..


30대엔 몰랐다.
왜 40대 선생님들이 소화 안 된다고 하고, 현미밥에 채소 샐러드 도시락을 싸서 다니고 유난을 떠는지...
그런 내 맘을 신은 비웃었을까?
40대가 되니 여지없이 내가.. 그때의 선배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었다.
어제도 샐러드 도시락을 싸와서 먹으며... 아. 속이 참 편하네... 하면서
10여 년 전 내가 선배들을 바라봤던 그 시선이 떠올라 잠시 또 호흡과 생각과 움직임을 멈추게 됐다.

이런 일들이 참 많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학생들의 모습과 내 나이의 모습이 닮아있을 때도
좀 더 따뜻하게 이해해 줄걸... 그런 생각도 들고.

내가 정말 죽을 거 같을 때...
다 지나간다고 말해주며 위로해 주던 사람들을 백 프로 믿지 못하며
'정말 지나가는 거야? 정말 좋아지긴 하는 거야?' 절규하며 생각했던 날도 있었지만...
정말 마법처럼 지나가고.. 좋아지는... 것들도 그렇고...(지금은 그 시간의 힘을 믿슙니다.)

뭐 등등


앞으로 또 얼마나 새로운 일들이 다가올까?


꽃보다 누나... 였던가?
윤여정 선생님이(왜 선생님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고 나오는)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오늘도 또 새로운 날을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변한 게 있다면..
그때보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왜 저럴까? 보다...

그럴 수 있겠다.
나도... 그럴 수 있겠다.

라고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윤여정선생님이 말했던..
'하나씩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은...
절망의 뜻을 품은 포기가 아니라...

'난 이렇게 살아내고야 말겠어.' '저렇게 살지 않겠어.'라고 붙잡을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대로, 내게 주어진 대로 때마다 노력하며 잘 살아내 보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런 생각을 하면
고통스러운 일이 생겨도
산 위 구름처럼, 그 아래 그림자처럼 금세 지나갈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고..
다른 이의 모습을 이해하는 마음이 넓어지고
이내 편안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
사람마다 다른 듯도 하고, 또 결이 닮아있는 것도 같은 인생의 많은 파도들.
그래서 두려움과 설렘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는 아침이다.


이 시 언젠가 써놓았던 시였는데.. 다시 떠올려본다.


아침
천상병


아침은 매우 기분 좋다
오늘은 시작되고
출발은 이제부터다

세수를 하고 나면
내 할 일을 시작하고
나는 책을 더듬는다.

오늘은 복이 있을지어다
좋은 하늘에서
즐거운 소식이 있기를


다가오는 일초, 또 일초가 새로운 시간이니
오늘 할 일들 천천히 하고
책도 한 번 더듬더보고...

한 번 미소 지으며 복 짓고

그래서 즐거운 하루를...
무탈한 하루를...
마무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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