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도 비어 있는 마음
새벽 공기는 얇고 차가웠다. 비가 와서 더 그런가 보다. 몸에 걸친 잠옷 한 장으로는 온전히 막을 수 없는 약간의 서늘함이 방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 공기 속에서 아들이 내 방 문을 똑똑 두드리며 나를 깨웠다. 눈을 반쯤 뜨니, 시계가 가리키는 건 6시. 아직 창밖은 희끄무레했다.
아들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없이 방을 나가더니, 곧 주방 쪽으로 걸어가고, 이내 정수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약을 털어 삼키는 소리가 짧게 들리고, 이어 냉장고 문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다시 여는 소리가 들리고. 부드러운 모터 소리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온다. 아들은 한동안 서서 냉장고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를 내가 가까이 다가갔다. 아들의 시선에는 찾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는 듯 하지만, 한 편 또 그게 뭔지 아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조금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발 먹을 만한 식재료 좀 사다 놓을 수 없어요?”
말끝에 담긴 날카로움이 내 귀에 닿는 순간,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매일 식재료를 채워 넣는 건 나다. 마트에서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냉장고 칸마다 채소, 고기, 계란, 반찬을 정리한다. 하지만 아들은 한 끼만 먹어도 다른 것을 찾는다. 그때 그 순간에 꼭 맞는, 지금 당장 먹고 싶은 그것이 없으면, 냉장고는 무의미한 창고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내 노력을 모르지 않을 텐데...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꾹 참았다. 아들이 이 말 뒤에 곧 미안해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후회의 표정을 이미 여러 번 봤다. 아들도, 나도 이런 새벽을 원하지 않는다.
아들은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핸드폰을 켰다. 화면 속에서 배달 앱이 열리고, 치킨집 목록이 스크롤된다. 이런 새벽, 기름지고 바삭한 음식이 위장을, 아니 머리를 달래줄 거라는 걸 아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5시와 6시 사이는 치킨집이 문을 닫는 시간이다. 기름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 새벽 시간에, 아들의 신경이 곤두서고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노선을 변경해서 편의점 목록을 열더니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는다. 튀김류를 선택하고 결제까지 했지만, 세 번이나 주문이 취소되었다. 튀김기를 가동하는 시간이 아니어서, 제품이 품절이어서.
기운이 빠지고, 손이 느려지고, 결국 아들의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그냥 서러운, 그냥 화가나는 호르몬의 불균형에서부터 시작된 감정기복. 그 모습이 내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다가가 아들의 어깨를 조용히 감쌌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다. 말보다 체온이 먼저 닿기를 바라면서.
누가 보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면일까 싶지만 아기가 되어버린 아들과 나 사이에 이런 장면은 늘 칼 끝에 선 듯 아슬아슬하고 아픈 장면이다.
7시-집 앞 편의점 문 여는 시간, 거기엔 튀김도 메뉴도 몇 가지 없다-가 되자, 아들이 나를 바라보더니 눈빛이 조금 부드럽게 풀린 듯하다. (이런 내 판단이 여전히 조심스럽다.)
“엄마가 집 앞 편의점 다녀와주시면 안 돼요?”
외출이 힘든 너.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부스스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귀 뒤로 넘기고, 눈가를 비비며 남은 자잘한 피로를 지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차갑고 습한 아침 바람이 스쳤다. 그 바람은 피부를 지나 가슴 안쪽까지 들어와, 잠시 심장을 식혀주었다.
편의점 진열대 앞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고 눈앞에 보이는 음식 이름을 하나씩 읊었다. 불닭김밥, 핫바, 레몬크림새우, 샌드위치… 아들은 그중 몇 가지를 골랐다. 약기운이 조금 돌았는지, 목소리가 이제야 꽤 차분해졌다.. 서둘러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온 것들로 아침을 먹는 아들의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배 속이 채워지자 표정도 조금씩 풀려갔다. 위장에 담긴 음식의 무게만큼 영혼의 무게도 묵직하게 중심이 잡히는 듯했다.
“오늘 아침 많이 힘들었구나.”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까의 볼멘소리는 사라지고, 아들의 차분한 목소리.
“고맙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붙잡고 있어야 할 건 바로 이 짧은 인사와 순간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아주 많이 어려져 버린 아들을 대하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돌아서서 주방으로 들어서니 냉장고 앞에서 들었던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것 좀 채워 넣으라-는 말이 귓가를 스쳤다. 그 소리를 희석시키려 싱크대에 그릇을 담그고 물을 틀었다.
'너의 허기는 언제쯤 채워질까 ?'
쏴아— 하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내 시름도, 너의 고단한 시간도 함께 씻겨 내려가길 바랐다. 더 힘을 내서 그릇들을 깨끗이 닦았다.
아들이 아직은 어린 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가끔 두렵다. 언제쯤 커서, 늠름한 어른이 되어 내 앞에 서 줄까. 가까울지 멀지 모를 미래의 풍경을, 희망을, 흐르는 물 속에 아른아른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