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밥을 짓는다.

다시 시작하는 아침

by 여름둘겨울둘

우울증.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고, 또 멀게만 느끼다가도 불현듯 가까워지는 이름이다.

쓸모없다는 생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화. 그래서 결국은 죽고 싶어지는 마음.


아들에게 그런 감정들이 밀려올 때, 결국 사람을 지탱하는 건 아주 작은 일상이었다.

세 끼 밥과 몇 시간의 잠,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엄마인 내가 이 아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들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밥을 차려주고,

잘 자라고 안아주고,

불을 끄고 방문을 조용히 닫아주는 일.

다시 아기로 돌아간 듯 반복되는 날들이 어느새 반 년째 이어졌다.

어제는 정기 진료 날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잠은 어때요? 기분은 어때요? 약은 잘 먹고 있나요?”

아들은 담담히 대답했다.

“잠도 잘 자요. 여전히 화나고 예민해질 때가 있는데 그냥 조금 지나면 괜찮아져요.”

“어떨 때 화가 나나요?”

“제 의도와 다르게 얘기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요.”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본인이 잘 잔다고 하고, 기분이 괜찮다고 하니 많이 좋아졌네요. 3년 전 처음 왔을 때는 자기 상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정말 많이 나아졌습니다. 비결이 뭔가요?

놀라서 나를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께 나는 요즘 아들과 대화를 참 많이 한다고 대답했다.

"요즘 생활에서 달라진 건 없나요?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지?”

아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운전 면허 따려고 시작했어요. 요즘 컨디션으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싶기도 하고요.”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저 견디는 데 급급하던 아이가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 말 속에는 분명 ‘다시’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웃으며 덧붙였다.

“혹시 하루 만에 포기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경험 자체로 소중한 거예요. 포기하는 것보다 도전하는 데 의미를 둡시다. 지금 나이에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많이 좋아져서 제가 기분이 좋네요. 다음 달에 또 봅시다.”

그 말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며 멈췄던 숨을 다시 쉬었다.

늘 ‘혹시 또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내 안에 가득했지만, 도전 자체가 의미라는 말 앞에서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다.

요즘 아들은 뉴스를 파고들며 세상을 배우고 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나도 남을 기분 상하게 할 수 있겠구나. 나도 실패할 수 있구나. 그래도 경험이 소중한 거구나. 도전이 중요한 거구나 생각이 들어요.”

그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예전 같았으면 분노와 불안으로만 가득 찼을 아들이 이제는 자기 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실패조차 경험이라 말할 줄 아는 변화는 내게 눈부시게 다가왔다.

나는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밥을 짓는다.

아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밥심으로 그 마음이 버텨주기를 바라며.

내 기다림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이제는 희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희망이란 것은 거창하지 않았다.

세상을 바꿀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주 짧은 말 한마디,

‘나도 해보고 싶다’라는 그 작은 의지가 내겐 새벽빛처럼 느껴졌다.

밥을 차리며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이 단순한 일이 정말 아이를 살리고 있는 걸까.

밥을 차려주고, 불을 꺼주고, 안아주는 이 행동들이 무슨 힘이 있을까.

하지만 문득문득 깨닫는다.

내가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단순한 반복이야말로 아이를 다시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라는 것을.

아이는 아직도 불안하다. 때때로 예민해지고, 작은 말에도 상처받는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견디며 하루를 채운다. 뉴스를 보고, 세상을 배우며 자신도 남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실패를 경험이라 부를 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이야말로 아들이 걸어가는 또 다른 성장의 길이었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아이가 밖으로 나가 세상과 부딪힐 때 다시 무너져 돌아오지는 않을까. 그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계속 반복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도 커져간다. 넘어져도 괜찮다는 것을, 도전 그 자체가 이미 한 걸음이라는 것을, 의사의 말처럼 이제는 나도 믿고 싶다.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밥을 짓는 내 손끝에서, 방을 닫으며 아이에게 머무는 내 눈길에서, 나는 오늘도 아이의 내일을 기도한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 같지만, 오늘은 분명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간 날이라고.

그 믿음 하나가 나를 버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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