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힘든 날들을 견뎌주어 고마운 너에게

by 여름둘겨울둘

2023년 3월, 너는 학교 밖 청소년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네가 깨어 있는지, 밥은 챙겨 먹었는지,
사람을 만났는지 조용히 눈치 보며 살폈다.
상처로 얼룩졌던 학교를 떠나면 조금은 나아지리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실제로 너는 잘 해냈다.
스스로 학원에 등록하고, 상담을 꾸준히 받으며,
커피를 배우고, 빵을 굽고,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갔다.
점심이 되면 냉장고 문을 열어 내가 아침에 준비해 둔 재료들로 볶고 끓여 혼자 한 끼를 잘 챙겨 먹곤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밥 하는 법, 간단하지만 요리 몇 가지도 곧잘 하던 너였다.

친구를 사귀고 관심 있는 박람회가 열리면
지하철 노선을 검색해서 혼자서도 잘 다녀왔다.
누구보다 잘 적응해가고 있는 듯 보여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그렇게 2024년이 되었고,
봄에는 혼자 일본 여행도 다녀왔다.
낯선 거리, 낯선 식당.
네가 보내온 사진 속에는
작고 붉은 등불이 켜진 야키니꾸 식당 안에 앉아서 식사를 기다리며 웃고 있는 너의 얼굴이 있었다.
그랬던 보송한 얼굴이, 그랬던 환한 웃음이
내 핸드폰 사진첩에서는 2024년 8월에 멈춰 있었다.

그 무렵부터, 너는 달라졌다.
단순히 우울한 아이가 아니었다.
폭탄을 실은 기관차처럼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전속력으로 달리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입시가 끝나고,
합격 소식을 들은 뒤,
대학교 입학식 날까지—
기관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말도 없이 조용히 멈췄다.
너는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아이가 되었다.
씻지 않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소리 없는 굴 안에 숨어버린 듯한 날들이 계속됐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봄이 끝나갈 무렵
네가 조용히 말했다.

“목욕이 하고 싶어요.”

오랜만에 들은 네 목소리는
덜 익은 나무처럼 가늘고 낯설었다.
나는 욕실로 가 따뜻한 물을 틀어두고
비누와 때수건을 꺼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고 앉았다.

조심스럽게 네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비누 거품이 부풀고, 라벤더 향이 욕실에 퍼졌다.
샤워기 물줄기와 묵은 때를 밀어내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기도하듯 너의 등을 밀었다.
이 거품 속에 네 고단했던 마음도 함께 씻겨 내려가기를 바랐다.
팔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엔 땀이 흘렀다.
내 힘든 만큼, 너의 아픔이 가벼워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을 때,
네가 무언가를 말했다.
물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물을 잠그고 다시 물었다.
“아들, 방금 뭐라고 했어? 잘.. 못 들었어.”

한참을 머뭇거리던 너는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엄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세 번의 고맙다는 말. 울먹이는 목소리.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네게 고개를 끄덕여주었을 뿐.
수증기와 땀으로 흐려진 내 얼굴 위로 뜨거운 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오늘도 나는 오랜만에 너의 등을 밀어주었다.
이번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 마음이 복잡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목욕 마무리를 하고 뒤늦게 욕실을 나오는 네 얼굴을 마른 수건을 닦아주며 말했다.
“보송보송하니 참 예쁘다, 우리 아들.”

로션을 넉넉히 펴 바르자
네 볼이 말랑하게 빛났다.
그리고 너는 미소를 짓고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편안한 얼굴로, 마치 오래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지금 나는
목욕을 마친 너의 평온한 얼굴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쓴다.

낯선 거리에서 웃고 있던 너,
그리고 울먹이며 고맙다고 하던 너.
두 시간 사이에 놓인 수많은 날들 속에서
나는 조용히 기도하듯 되뇐다.

고맙다.
힘든 날들을 견뎌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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