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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an 03. 2021

세르반테스 생가에 올라가다

1층으로 올라갑니다

자, 세르반테스의 생가 입구부터 시작해 0층의 파티오에 들어서면서 내부의 진료실이며, 사랑방, 식당, 여인들의 방 등을 둘러 보았고, 이제 1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왜 2층이 아니고 1층인지는 다들 아시지요)

들어가면 관람 순서는 그곳에 있는 안내원이 안내를 해줍니다. 작고 무료 입장임에도 아래층에는 3명, 윗층에는 2명이 상시대기하고 있어요. 어디부터 둘러보라고 알려줍니다. 좁은 데서도 동선이 꼬일까봐 그런가 봐요.


계단을 따라 올라간 윗층은 침실과 전시회장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걸 보면 이곳이 과연 생가가 맞느냐 라고 여길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이곳은 20세기 중반까지 계속 논란이 있어왔어요. 워낙에 작가의 유년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적어서 그런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지난 번에 소개한 생가 옆의 안테사나 병원이 미겔의 아버지 로드리고 세르반테스가 일했었던 곳이라는 점을 빌어 거듭된 연구와 조사 끝에 1948년 마침내 생가임을 확증합니다.


기나긴 고증 끝에 확증을 받고 1954 알칼라의 시의회는 건물 매입 후, 교육부에 넘기고 2년 후 복원 및 재건 작업하기에 이릅니다. 500년도 더 된 곳이 이렇게 멀쩡하게 남아 있기란 힘들겠지요. 혹시 이 얘기를 듣고 김 빠졌다거나 맥이 풀리셨나요. 우리가 다녀가 보고 알고 있는 건축 유산들의 상당 부분이 실은 복원 작업을 거친거랍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스페인도 내전을 거치는 동안 아까운 목숨뿐 아니라 숱한 문화유적이 파괴되는 일들을 겪었거든요. 오히려 그런 피폐한 전후 상황에서도 손놓지 않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고증작업을 통해 복원하고 재건한 그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더는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려는 정성을 리스펙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돈키호테 2권, 26 화 베드로 선생의 제단화를 나타낸 인형극

꼭두각시 인형 전시실입니다. 알칼라에 축제기간이 있을 때면 이런 인형극 앞에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모여들어요. 4월 23일 국제 책의 날 행사, 5월 18일 국제 박물관의 밤 축제, 10월 9일 세르반테스 주간 행사 이렇게 펼쳐진답니다. 2020년엔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지만, 올해는 본래대로 돌아가 아이들과 시간여행을 하며 같이 인형극의 재미에 푹 빠져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근엄한 침실

작가 세르반테스, 아니죠, 그의 아버지인 로드리고의 침실입니다. 하급귀족이긴 했어도 침대 위에 근사하게 캐노피도 달고 그 옆에는 카톨릭 성인 조각상도 놓았어요. 중동을 가보면 이슬람교가 종교를 넘어 생활의 기반이 된 것처럼, 유럽도 기독교 (카톨릭과 개신교)는 거의 생활로 자리잡혀 있지요. 클래식한 조각과 회화를 보면 늘 기독교의 상징이 숨어 있고, 그것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마음의 안정을 얻고 기도하며 묵상했겠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침대 앞에 있는 궤. 우리나라는 주로 직사각형인데 여기는 캐리비안의 해적에 어울릴 거 같은 봉긋한 모양입니다. 지금도 가죽 공방에 가면 저런 궤를 제작하는 장인이 있어요. 전에 VVIP 분들을 모시고 남부 안달루시아의 꼬르도바에 갔을 때 들린 적이 있는데, 가격이 제법 후덜덜 했죠. 저 안에 어떤 물건을 담아두었을까요? 대를 물려가며 쓸 타임캡슐로 봐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침실 맞은 편에는 서재가 자리잡고 있어서 그곳에서 각종 문서와 서류를 집필하고 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그곳에서 돈키호테를 썼다면야 정말 완벽한 스토리 라인이 이루어지겠지만, 아쉽게도 그가 구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감옥이었어요. 그러고 보면 위대한 작가의 탄생 조건이 꼭 한강뷰를 내려다 보며, 원목의 책상과 오렌지빛 무드 조명, 그리고 전문 작가 스멜을 한껏 고취 시켜줄 만년필 셋트를 두고 한켠엔 갓 끓여낸 차 한잔까지 근사하게 갖춰야만 하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웬지 위안이 되네요. 아, 감히 한 세기의 문학천재를 두고 필부와 비교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작은 꿈이나마 품어볼 수 있지 않겠어요.


어머니의 소박한 침실

아버지의 방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의 침실이에요. 생각보다 많이 소박하지요. 그보다도 왜 부부가 한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따로 잤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카톨릭의 위대한 보호자로 자처한 스페인에서는 부부라 할지라도 형식상으로는 종교윤리상 엄격하게 선을 그어놓곤 했지요. 요즘처럼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어 각방써! 하는게 아니랍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일곱 자녀나 두었으니 엄마의 손을 안 탈 수가 없겠다는 점도 있겠고요. 하녀와 유모가 돌아가며 아기를 본다 해도 엄마의 자리는 여전히 필요했겠지요. 한편, 유럽의 오래된 침대는 볼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어요. 왜 항상 뿔룩! 할까요. 현지인들도 이유를 잘 모르던데 혹시 아시는 분 계신가요. 실제로 저 침대에서 잔다면 전 몇 번이고 굴러 떨어졌지 싶어서요.



 

 

좌측: 하인들의 글씨 연습 / 중앙: 하인, 하녀의 작업실이자 휴식 공간 / 우측: 변기와 세탁통

위에서 본 사모님의 침실은 아버지의 침실과 같이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이처럼 세탁실과 화장실 옆에 위치해 있답니다. 즉 좌측 침실, 중앙 화장실, 우측 하인들 휴식 및 작업 공간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 순서와는 달라요. 이건 제가 아무리 시도해도 브런치에서 바뀌어지지 않네요) 여자들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지요.


세탁실과 화장실이 아랫층이 아닌 윗층에 있다는 점이 흥미로와요. 파티오만 아니었음 거기에 이런 작업실을 마련했을지도 모르지만, 환경과 문화의 영향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지요. 변기의자를 한 번 보세요. 커버가 넘 고급이지 않나요. 행여나 일 보다가 묻을까 튈까 걱정입니다. 사진상에서 보기 보다 실제는 높이가 좀 되던데, 스페인 사람들이 북부를 제외하곤 원래 그리 키가 큰 편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저게 가능했을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빵 터졌답니다. (식사 중이시라면 죄송합니다)


저 변기 의자 밑의 통을 보고 나니 이해가는게 있어요. 바로 향수와 하이힐. 근대 이전까지 유럽은 화장실이며 상하수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하녀가 아침이면 조심하라며 목청을 높이고 위에서 요강을 쏟아붓곤 했지요. 귀부인이든 신사든 오물을 최대한 밟지 않기 위해 굽이 높은 신을 신어야 해서 나왔다는 하이힐과, 아울러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썼다는 얘기, 유럽에 여행 오면 다들 한번은 들어지요?


세탁실 우측에 있는 하녀의 방이에요. 하루 종일 일을 보는 하녀들도 시에스타를 취해야 할 거 잖아요. 기본만 갖춰져 있는 침대가 있고, 그 앞에는 물레며 빨래통과 같은 가사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어요. 그리고 역시 화로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글을 알아야 했죠. 정성스럽게 쓴 ABC 알파벳이에요. (K와 W는 당시 스페인어에는 없던글자라 없답니다. 이건 나중에 스페인어 편에서 얘기해 드릴게요) 소박한 꿈 중에 하나가 깃털펜에 잉크 찍어 가면서 글 써보는 건데, 천방지축인 세 아이들 다 크기 전에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문서를 보관한 장식장. 각 함은 열쇠로 열게 되어 있어요.

전시장실에 별도로 마련된 장식장이에요. 그 당시에 있던 것은 아니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기념해서 만든 장인의 장식품이랍니다. 중앙에는 돈키호테를, 양쪽에는 작품의 장면을 한땀한땀 정성들여 세공했어요. 그리고 맞은편에는 붉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서로 배색을 달리 장식장이 하나 더  전시되어 있어요.

전시장에는 세르반테스와 관련된 것은 물론 스페인의 문학의 황금세기였던 16~17세기 작가들의 원본과 복사본들을 전시하고, 그 외 분기별로 특별전 형식으로 문학관련 예술품들을 전시하곤 합니다.


아내와는 오전 시간에 쉽게 들려볼 수 있지만, 아이들과는 주말 밖에 시간이 안 되기 때문에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항상 밖으로 길게 줄이 나 있거든요. 대여섯 번의 시도 끝에서야 비로소 아이들에게 세르반테스의 생가를 보여줄 수 있었어요. 들어가기 전에 5분 남짓 기다리는 동안 세르반테스에 대해 설명을 하자 학교에서 배운 것과 같이 소화시키는 첫째. 아빠의 설명을 듣다가도 금새 딴길로 빠지는 둘째. 설명 보다는 뭐든 보이는 대로 만지고 싶어하는 막내 딸.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 듯 해도 한 가족이 오붓이 살았을 이 공간에서 사십 여분 남짓 즐거운 시간 여행을 해 보았습니다. 다같이 꼭두각시 인형 앞에서 사진을 남기며 코로나가 끝나면 세르반테스의 축제가 열릴 때 꼭 다시 오자고 했어요.




신분제가 확실했던 옛날의 삶은 불공평 하다 싶어도 그저 신분에 맞춰 평범하게 살았을 것만 같은데, 사극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요. 역사적인 내면을 보자면 일단 가장 근본적인 먹고사니즘의 식량난부터 시작해 수시로 벌어지는 온갖 전쟁으로 인생이란 전투 그 자체였을거에요.


세르반테스만 해도 이처럼 괜찮아 보이는 집에서 무슨 문제가 그리 컸을까요. 집안의 빚 때문에 겨우 6살 나이에 아버지가 옥고를 치룹니다. 아버지의 일로 온 가족이 세비야, 꼬르도바, 마드리드 등을 다니며 떠돌이로 생활하다시피 해야했어요. 배움에 목마른 미겔은 뭐라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공부를 하려 했겠지요. 그렇게 성장한 그가 겨우 24살 밖에 안 된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평생 외팔이가 될 거라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요. 심지어 나중에 본인도 쇠고랑을 찼으니 환갑 전까지 그 인생은 누가 봐도 부인하기 힘든 '루저' 그 자체였을꺼에요.


그럼에도 그는 차디 찬 감옥에서 <돈키호테>를 구상하고 글을 쓰며 자신의 이상을 불태웁니다. 비록 베스트셀러 작가 되었음에도 끝까지 잘 풀린 인생이 아니었다는게 아이러니하고 짠하지요. 그럼에도 <돈키호테>를 쓰면서 "그는 나를 위해 태어났고,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다"며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돈키호테에게 투영해 내었어요. 그렇게 세르반테스는 죽을 때까지 푸른 이상을 꿈꾸며 청춘을 살다간 사람이 아니었을까 해요.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요.


그러하기에 돈키호테의 묘비명에 새겨진 "미쳐 살고 정신 들어 죽은 자"가 웬지 슬프지만은 않아요. 그 미침이 단순한 광기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400년 전 그의 혼란가득했던 삶을 반추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 그리고 이 여행기를 같이 읽는 당신에게,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하는 따뜻함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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