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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an 24. 2021

돈키호테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Puerto Lápice 푸에르토 라피세

기사 돈키호테, 스페인에 오기 전까지 그는 내게 이름만 알려진 인물이었다. 스페인의 돈키호테를 우리의 무엇에 견줄수 있을까, 홍길동? 봉이 김선달? 우리나라에 없던 스페인만의 기사문학이었기에 아이들에게 연결하는 건 무리수였다. 다만 그 영향력을 보자면 돈키호테는 여느 실존인물 보다도 더 깊숙히 스페인 사람들의 정신을 대표한다. 돈키호테, 아니 알론소 끼하노 어르신. 세르반테스의 기사 소설 속 주인공은 이제 만화와 영화, 뮤지컬, 발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스페인의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빠짐없이 등장하며 어른들에게도 회자되는 돈키호테는 어떤 인물일까.


먼저 돈키호테가 활동을 펼쳤던 카스티야 라 만차 지방을 찾아가 본다. 지난 번에 찾아간 톨레도에서 한 시간 채 걸리지 않는 곳이다. 카스티야 라 만차 지방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먼저는 마을마다 있던 성곽을 뜻하는 카스티야 Castilla 다. 지금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옛날엔 평원과 언덕 곳곳에 영주들마다 성을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얼룩이란 뜻의 라 만차 La Mancha 인데, 그 중 La는 여성명사 앞에 붙이는 관사이다.


참고로, 스페인어의 만차는 이태리어로 마키아라고 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즐겨 마시는 커피, 카라멜 마키아토 caramel macchiato 란 카라멜로 밀크커피 위에 얼룩을 냈다는 뜻이 된다. 스페인에서는 만차도 manchado 라는 이름으로 커피를 주문하면 (메뉴에 없어도 가능하다), 라떼보다 더 듬뿍 우유를 넣어준다.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지만 커피 맛이 너무 약하다며 호불호가 있는 편이다.


넓디 넓은 대평원에선 봄부터 겨울까지 노란 유채밭, 붉은 아마폴라 (양귀비), 보랏빛 라벤다, 황금빛 해바라기, 베이지 색의 밀밭과 푸른 올리브 등등 계절별로 갖가지 색상으로 땅이 곱게 수놓아져 있는 것이 그들 눈에는 얼룩덜룩한 반점처럼 보였기에 성과 얼룩(무늬)의 땅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몇 시간을 달려도 끝이 없는 이곳은 사람의 그림자가 일체 보이지 않아 과연 누가 살고는 있을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실제로 라 만차 지방은 스페인의 자치지방 중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곳으로 서울의 1/618 정도 밖에 안 된다. 


인적만 드문 것이 아니라 키우는 가축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쓸쓸함 보다는 광활한 이곳을 무대로 펼쳐졌을 돈키호테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달리는 동안 낮 하늘의 구름은 손에 잡힐 듯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붉은 토양은 푸른 하늘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보는 이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반면 저녁 무렵의 하늘은 구름 속에 숨은 태양이 남기는 아쉬움 짙은 여운의 인사에 그 날 하루의 감사와 내일의 소망을 품어보게 한다. 아이들 눈에는 자칫 지루하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갑갑했던 도심지에서 벗어난 어른의 눈에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감이 교차하며 힐링을 맛본다. 


카스티야 라 만차의 노을




라 만차의 마을마다 전부 돈키호테 조형물을 세워두고 저마다 돈키호테와 관련된 단서를 제시한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상의 인물의 영향력에 놀라게 된다. 심지어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외에서 찾아오는 걸 보면 '해리포터'의 원조가 바로 돈키호테가 아닐까 싶다. 초콜릿 복근의 상남자도 아니고 너무 말라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기운 없어 보이는 노인의 모습에 다소 실망을 가져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기어코 발걸음을 옮긴다. 무엇 때문일까. 문학과 문화의 힘은 이성과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라 만차 지방에서 녹색 표지판에 흰색으로 X자 표시를 한 ‘돈키호테의 길’ Ruta del Quijote 을 따라가 보면 뿌에르또 라삐세 Puerto Lápice 라는 주민이 겨우 천 명 남짓한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곳에는 돈키호테가 기사 서품식을 치룬 곳이자 여관인 벤타 델 키호테 Venta del Quijote 가 있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부 안달루시아로 내려갈 때 거쳐 가는 곳이라 늘상 많은 손님이 있던 곳이다. 


식당과 기념품 매장이 연결된 그 곳엔 무료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지만 예상 외로 세심히 공들여 자료를 수집하고 장면을 재현해 놓아 돈키호테 기분을 내며 사진으로 담아두기에 손색이 없다. 식당 앞에 있는 비쩍 마른 돈키호테 동상은 무심히 사진 모델이 되어 열일을 한다. 심지어 식당 귀퉁이에는 돈키호테 내용을 깨알보다 더 작은 글씨로 깜지 마냥 종이 한 장에 채운 작품도 있다.


벤타 델 키호테의 박물관




나처럼 깡 마르고, 덥수룩한 수염에, 싸우기만 하면 굴러 나가 떨어지던 돈키호테. 아니 알론소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볼품 없어 보이기만 한 그를 담아가는 걸까. 측은함에서 나온 연민과 동정일까, 아니면 이상을 향해 실행하는 뚝심과 용기에 대한 찬사일까.  


뮤지컬 <라 만차의 사나이>에 나오는 <이룰 수 없는 꿈>이란 가사를 곱씹어 본다. 걸핏하면 주위의 환경에 휩쓸리는 나약한 나를 볼 때, 돈키호테가 가진 불굴의 용기는 그 어떤 웅변과 설득 보다도 강력하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뮤지컬 라 만차의 사나이, <이룰 수 없는 꿈> 가사 전문


돈키호테를 통해 전하려는 작가의 의도, 불운한 삶에도 좌절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려는 그의 절절한 투지 서린 글에, 검은 눈의 이방인은 작지만 또렷한 희망을 본다.


푸에르토 라피세의 돈키호테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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