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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an 28. 2021

돈키호테의 풍차를 찾아보자

스페인의 콘수에그라와 캄포 데 크립타나 여행

아이들과 돈키호테를 찾는 여정이 카스티야 라 만차의 푸에르토 라피세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이어진다. 이제는 나조차도 스페인 하면 돈키호테 라는 공식이 아예 인에 박인듯 싶다. 아이들의 학교에서도 돈키호테의 챕터 두서너개 정도는 수업시간에 다루는데, 반복학습이 따로 없다. 몇 개의 테마만 알고 있으면 스페인 여행이 가능하겠다는 착각마저 든다. 그렇지만 세계의 관광대국이라는 이 땅 스페인이 단순히 펜대 굴려 나오는 정도만으로 쉽게 끝날리가 있겠는가.


여하간에 아직은 세르반테스의 손 안에서 돈키호테의 흔적을 따라 다니는 중이다. 아이들과 거리며 상점 곳곳에서 아이템을 주워 모으며 보물찾기를 한다. 돈키호테 탐험대는 우리 뿐만이 아니다. 현대인은 과거의 그를 찾아 떠나고, 로시난테에 몸을 싣고 이미 떠나간 그는 숨바꼭질 하듯 조금씩 흔적을 남긴다. 어쩌면 헨젤과 그레텔의 주머니에서 꺼낸 흰돌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푸에르토 라피세에서 본 돈키호테의 주막에서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곧이어 풍차의 마을로 떠난다. 콘수에그라 Consuegra 와 캄포 데 크립타나 Campo de Criptana 두 마을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풍차가 있는 한적한 마을일 뿐이지만, 행정적으로 두 마을은 서로 다른 지방에 속해 있다. 콘수에그라는 톨레도 지방에, 캄포 데 크립타나는 시우다드 레알 지방에 속해 있다. 물론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곳이니만큼 두 지방은 모두 카스티야 라 만차 자치 지방에 들어간다. (머리가 복잡하니 넘어가야겠다.)


콘수에그라의 풍차




먼저 콘수에그라에서는 열 두 개의 풍차가 우리를 맞이한다. 큼직한 흑판용 하얀 분필이 나란히 산의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있다. 마을 이름을 잠시 파자(破字)해 보면, 콘 Con은 ‘함께’란 뜻이고, 수에그라 Suegra는 시어머니 또는 장모를 뜻하니,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동네라도 된다는 것일까. 아니다, 그저 아재개그일 뿐이다. 삼대가 주말에 모여 식사를 같이 하는 일은 흔히 보지만, 모시고 사는 경우는 여기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각박해서가 아니다. 본인의 건강상태가 정정한 이상, 자기 하고픈 대로 사는 것이 정신건강상 더 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손주는 예쁘지만 안 오면 더 예쁜 존재인걸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디서건 비슷한 점들이 있다는 점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풍차를 찾아보러 올라가보니 걸어서 가긴 좀 힘겨운 길이다. 그렇다고 차로 가기가 딱히 편하게 되어 있지도 않다. 길이 워낙에 좁아서 이곳에 수시로 찾아드는 대형버스 기사들은 언제나 미간엔 내 천(川)자가 그어질 법한데, 유유자적 언제나 이곳 사람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덕분에 마음 졸이는 건 언제나 내 몫이다. 유럽에 십 년을 넘게 살아도 여전히 내 뼛 속까지 스며있는 빨리빨리, 아니 부지런떠는 이 습관은 쉬이 바뀌어지지 않는다.


풍차들이 주욱 늘어선 꼭대기에 올라와 보니 바람이 야무지게 머리칼을 휘날리고, 산발하는 머리털은 뺨을 갈겨댄다. 하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그저 관광용의 풍차에 불과하지만, 그 옛날엔 실제 방앗간 기능을 하려면 풍차의 날개를 돌리기 위해 산들바람은 광풍 마냥 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저기 긴 머리의 여인들은 벌써부터 광녀가 된 자신과 친구들을 보며 미친듯 깔깔대며 웃는다. 아무 말 없이 자연의 바람 한 줄기 만으로도 사람은 이렇게 웃음이 터지는가 보다. 아래 들판에선 때마침 거름이라도 푸짐하게 뿌려댔는지 평생가도 잊지 못할 고향의 냄새가 점막에서 향연을 이룬다.


풍차 앞에서 바람과 햇볕에 눈 못 뜨는 아이들


자연의 손질을 받은 머리칼이건, 식욕을 확 줄일 냄새건 그래도 위에서 내려다 보니, 지평선으로 펼쳐지는 밭이 끝이 없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맞서 싸운 돈키호테가 환생한 거 마냥 당당하고 멋진 자세들을 취한다. 시원한 바람 속에 남녀할 거 없이 대장부가 되어 호쾌함을 펼쳐 보인다.





콘수에그라에서 남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캄포 데 크립타나가 있다. 스페인 곳곳엔 캄포 Campo 란 이름을 가진 곳이 많은데 (Cruzcampo 란 맥주 브랜드로도 유명하다) 영어의 캠퍼스 Campus와 닮은 이 단어는 둘 다 라틴어 Campus캄푸스, 즉 들판이란 뜻에서 출발한다. 스페인어는 여전히 시골, 농촌, 들판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반해 영어는 대학교 교정이나 건물의 대지를 뜻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왜 그럴까.


이민자로 이루어진 미국에서 한없이 드넓은 땅에 대학을 세운 후 유럽의 교수들을 초빙하자, 방문한 그들의 눈에 이건 학교 라기 보다는 푸른 들판에 가까울 정도로 광활했기에 캠퍼스란 단어를 쓰게 된 것이다.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닌데서 시작한 단어가 어느새 우리나라에서는 프랜차이즈 회사의 건물 마저도 곳곳에 캠퍼스라는 걸 내걸을 정도가 되었으니, 언어란 항상 시대를 따라 변형하는 걸 본다. 동네 이름을 알아보다 잠시 다른 곳으로 다녀왔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마을은 "크립타나의 들판" 이란 뜻이 되겠다.


힘들게 올라가 대찬 바람을 맞으며 띄엄 띄엄 풍차를 보던 콘수에그라에 비해, 캄포 데 크립타나는 말 그대로 들판 위에 풍차들이 야트막하게 스머프들의 집이라도 이룬듯 옹기종기 모여있다. 마을 집들이 바로 근처인데 이렇게 뜬금없이 등장한 풍차, 그럼에도 그 휑한 들판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아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캄포 데 크립타나의 풍차





스페인은 살면 살수록 느끼는게 있다. 프랑스처럼 아기자기하게 한번이라도 더 눈길이 가게끔 잘 꾸며 놓지 않았다. 이태리처럼 근사한 마케팅으로 있어빌리티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스페인의 매력은 날 것이다. 생생하다 못해 옛스러움 조차 혈기 왕성한 청춘인 스페인의 건축 유산들, 이들은 땅에 박혀 있는 풍차가 아닌 돈키호테에게 달려드는 거인처럼 바로 눈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보여준다. 유약한 내게 스페인은 상남자의 기상이 무언지를 보여준다랄까. 압도하면서도 같이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푸근한 이미지가 스페인이 가진 마법이고 매력이었다.    




기사 코스프레에서 시작한 알론소 끼하노는 자신 스스로 돈키호테를 만들었다. 작가가 만들고 설정한 인물이 아닌 소설 속 작중 인물이 만든 주인공, 돈키호테. 돈키호테는 또 하나의 자아였다. 돈키호테를 통해 끼하노는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 그건 탁상공론이 아니었다. 좌충우돌 몸으로 부대끼며 실수와 실패로 얼룩진 가운데 자신만의 투박한 삶의 의미를 건져냈다. 돈키호테를 찾아 떠난 카스티야 라 만차, 저마다 돈키호테의 마을이라며 내세운 그곳에 실상 돈키호테는 없었다. 다만 그의 흔적을 찾으려고 직접 발품을 팔아 찾아간 내가 있을 따름이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환경에 매이지 않고 몇 번이고 깨지고 부서져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고야마는 키호티즘의 태도는 스페인만의 정신을 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강자에겐 굽힘 없는 기상을, 약자에겐 사랑과 관용의 태도를 보인 돈키호테의 모습은 그저 깡마른채 정신 나간 노인이 아니었다. 세월만큼이나 가치있게 쌓인 인품과 기백이 깃들어 닮고 싶은 어르신의 자화상이었다. 흥이 난 아빠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실은 돈키호테 라고, 아니 아빠도 돈키호테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은 미소와 큰 웃음으로 화답을 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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