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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an 02. 2021

세르반테스 생가에 들어가다

-일단은 작가 얘기부터 들어봅시다

자, 이제 우리는 들어갑니다. (정말?) 그래도 한번은 누구네 들어가기 전에 그가 누구인지는 좀 알아야 되지 않겠어요.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사실 그 외에도 로뻬 데 베가, 로르까, 그리고 이번에 아마존에 시집을 출간한 저에겐 형님 같은 친구 호르헤 까마초도 있지만, 아쉽게도 딱 떠오르는 분이 없어요. 일단 스페인 하면 돈키호테, 돈키호테 하면 세르반테스로 이어지는게 정석이지요. 세르반테스가 과연 어떤 분이길래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을까요.


1547년 9월 29일 이곳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사실 세르반테스는 아버지의 성이에요. 이름은 미겔이랍니다. 풀네임은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미겔 데 세르반떼스 사아베드라 입니다. 참고로 미구엘 아니에요. 그건 영어식 발음이거든요. 미겔이 맞답니다.


게다가 영어와 달리 스페인어는 아버지의 성을 먼저 써요. 그렇다고 사아베드라가 어머니의 성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에요. 이게 도대체 뭔 일일까요. 일설에 따르면, 사아베드라는 아랍어로 절름발이를 뜻하는 샤이베드라에서 왔다고 해요. 본인이 레판토 해전에서 다친걸 그렇게라도 남기고 싶었나 봐요.


태어나서 열흘 뒤인 10월 9일에 어린 미겔은 전에 소개한 사진, 성모 마리아 마요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어요. 안타깝게도 그 성당은 스페인 내전 당시 파괴되어 지금은 탑만 남아있어요. 이를 기념해서 (코로나해인 2020년은 제외하고) 매년 10월 9일이면 알칼라에선 세르반테스 축제가 열려요. (우리는 한글날 국경일이지요!)

세르반테스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있고, 뒤에 그가 세례받은 성당의 탑이 보인다.




세르반테스는 원래 작가가 아니었어요. 금수저도 인싸도 아니었어요. 지금이야 의사라면 누구든 알아주지만, 옛날엔 지체높은 귀족이 피고름 짜는데 손을 댔을리 만무하잖아요. 게다가 집안은 가난한 빚쟁이였어요. 하도 빚에 시달려 이사도 자주했어요. 7남매중 넷째인 미겔에게 유년시절이란 그야말로 맴찢...


대학교육은 물론 정식 작가 교육도 당연 못 받았어요. 나중에 커서 군에 자원입대해서 전투 중 팔 다치고, 성당에 밀 실어 나르며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다 비리 혐의로 옥살이는 치루는 등 삶이 제대로 폈다 싶은 적이 없었어요. 누구나 다 아는 돈키호테는 환갑 다 되서야 탈고했고요. 늦깍이도 이런 늦깍이가 없어요.


심지어 세금 징수원이 된 것도 실은 유대인인 어머니가 유대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했음에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다른 일반적인 직업은 갖지 못하고, 그 당시 천하게 여기던 돈을 다루는 것만 할 수 있어서 그리 되었다는 얘기도 있어요. 뭐하나 본인 뜻대로 되는게 없으니, 이 분도 참 찐 기구한 인생이에요.


1605년 포르투갈어로 발행된 돈키호테, 450년 전 스페인에 BTS 저리가라할 인싸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 할정도로 베스트셀러였지만 계약 문제로 인세를 제대로 받지도 못해요. 게다가 인기를 끄니 왠 해적판이 그리 난리를 치던지. 그래서 아예 후속편을 쓰면서 주인공인 돈키호테가 죽는 걸로 끝맺어요. 그래야 더는 이야기가 안 나올테니까요.


그러고서 후속편을 출간하고서야 비로소 인세 좀 제대로 받나 싶었는데, 얼마 안 되어 작가 본인이 모진 세상을 등지고 떠나요. 정말 이렇게나 안풀린 인생이 있을까 싶어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저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동병상련의 마음 마저 듭니다. 시간은 달라도 인생이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기본 전제는 동일한가 봐요.


현대와서 유명한 예술가나 문인치고 당대에 제대로 인기를 누린 분들은 그리 많지 않죠? 세르반테스는 인기는 누렸지만 그 영광을 본인이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으니 뭐랄까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인쇄업자가 받은 셈이네요. 하지만, 문인으로서의 그의 영향력은 언어에 나타나요.


그의 작품에 쓰인 어휘 덕에 스페인어를 두고 '세르반테스의 언어'라고 할 정도거든요. 유로화 동전 중 스페인에서는 10, 20, 50 센트에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요. 비록 아쉽게도 생전 초상화가 없어서 모두 상상이긴 하지만요. 그의 고향인 알칼라엔 온통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며 동상 심지어 낙서 조차 전부 그분으로 도배되어 있어요. 저 멀리 멕시코에선 국제 세르반티노 축제로 난리고요. 이렇게나 유명한 분이 의외로 우리에겐 돈키호테 작품 하나로만 알려져 있다는 것도 참 의외지요.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챨리 채플린의 명언을 고스란히 담아간 분이 바로 이분이지 않았을까 해요. 그럼에도 그의 생가에 들어서면,

"건강한 외팔이, 모든 것에 유명하며, 즐거운 작가이자, 뮤즈의 기쁨" 이라는 동판이 맞이해 줍니다.

세르반테스 탄생 450주년을 기념해 1997년에 제작된 동판 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이곳의 입장료는 얼마일까요?

없어요. 네? 네, 없답니다. 정말로요.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고요.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반까지 운영해요. 코로나로 수개월 문 닫았다가 최근 재개해서 꾸준히 손님들의 발걸음이 오가고 있어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우물이 있는 파티오 patio

일단 들어가면 우물이 있고 집 안에 자그마한 정원 같은 공간이 나와요. 이곳을 빠띠오patio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는 안뜰, 중정 이라고 하는데 보통은 테라스와 혼용해 쓰기도 해요.


스페인은 역사 특성상 800년 가까이 아랍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런 중정건축문화가 대표적인 예에요. 번잡했던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면 바로 방이나 거실로 안내를 받는게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두었지요. 정원으로도 꾸미고 때로는 분수도 두어서 휴식의 공간이자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사용하곤 했어요.


마드리드 근교나 지방에서는 따로 파티오 축제를 열어서 집집마다 예쁘게 꾸민 파티오를 자랑하려고 문을 열어 놓기도 해요.




먼저 들어가 볼 곳은 근엄한 사랑방이에요. 우리처럼 좌식 문화가 아니기에 딱딱한 의자를 놓고, 겨울에는 우리나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영하 2~3도 정도는 되고 으슬으슬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 때문에 커튼을 드리우고, 바닥에는 양탄자를 깔고, 가운데 화로를 두었어요. 이 화로는 방마다 하나씩 있답니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스페인에서 화로라니, 좀 의외이지 않나요?

유럽의 화로는 이집트 문명을 시작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쓰였어요. 하지만 그 이후론 다른 유럽문화권에선 잘 보이질 않았어요. 워낙에 날씨가 추우니 화로 정도로는 감당이 안 되어 무조건 벽난로를 두고 장작을 직접 때야지만 겨울을 날 수 있었을 거에요.

스페인은 아시아계인 아랍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쓰이기 시작해서 벽난로를 대신했지요. 하인, 하녀들이 정말 바빴을 거 같아요. 지금은 이곳 스페인에서도 새로 짓는 아파트의 경우 일부 바닥에 열선을 깔기도 하지만, 16세기 스페인인들이 우리의 온돌을 봤더라면 무척 놀랐을 거에요.

무게감이 있는 사랑방



미겔의 아버지 로드리고 세르반테스가 외과의사였다는거 기억하시죠. 아래 사진은 그 분의 진료실이랍니다. 의자가 재밌게 생겼죠. 두 다리를 따로 둔 점이 흥미로워요. 환자들이 없을 때면 웬지 저기서 잠깐씩 쪽잠을 잤을 수도 있겠단 상상도 들고요. 혹시 저 의자에 있는 접시를 보니 돈키호테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의 작품에서도 돈키호테는 이발사의 놋대야를 무어 왕의 투구라 하고 쓰고 다녔지요.

아버지의 진료실



사랑방과 진료실 곁에는 16세기 당시의 식당과 부엌이 있어요. 식당은 식탁과 의자를 두고도 공간이 무척 여유가 있어요. 하지만 부엌은 사람 둘만 들어가도 왔다갔다 하다가 솥 떨어뜨리고 그릇 엎고 했을 정도로 놓인 그릇에 비해 공간이 좁아요. 일하는 자는 좁은 환경에서, 그걸 대접받는 자는 넉넉한 공간에서. 웬지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고 느낀다면 너무 비약이 심한 걸까요. 그래도 저 주방에서 추운 겨울에 따스한 수프(sopa 소빠)를 준비하며 즐거워 했을 걸 상상하면 나쁘진 않을 거 같아요.

(좌측) 식당: 매우 단순하고 딱딱한 느낌이에요  /  (우측) 부엌: 국자며 질그릇이 정감을 더합니다.



식당에서 나와보면 여인의 방이 있습니다. 바닥에서 살짝 띄운 단 위에 두툼한 덮개를 깔고, 앞에는 화로를 두어 따뜻하게 하고 거기서 물레를 돌리며 실을 뽑고 애를 보며 책을 읽었어요. 맞은 편에는 류트가 있어서 이곳에서 집안 여인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걸 짐작해 봤어요. 집안일이야 하인과 하녀가 다 할테니, 엄마와 딸들, 이웃집 부인은 이곳에 모여서 끝없이 이야기와 수다 속에 동네 소식이며 대소사가 오고갔을 것이고, 답답하다 싶으면 악기 연주와 노래 속에 속을 풀었을 거에요. 스페인 사람들의 수다력은 가히 남녀노소 불문하고 시간이 가는 줄 몰라라 하는데, 어쩌면 저도 여기 있었음 딱 맞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기 머물면 오가는 수다 속에 하루도 짧을 겁니다




아버지가 의사였음에도 빚이 많아 이곳저곳 옮겨 다녔다는 얘기를 먼저 들어서 그런지, 집을 둘러봐도 화려하거나 으리으리 하기 보단 크기에 비해 소박하단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들어요. 사진으로 보는 입장에선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네요.


한편 어린 미겔은 제대로 공부도 할 수 없어서 길가에 인쇄점이나 서점 또는 오가는 대학생들의 책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종이 쪼가리를 주워다 몇번이고 읽었다 하니 마음이 짠해집니다. 아니면 그 열정을 높이 사야 할까요. 어쩌면 그의 학력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보니, 이 얘기는 후대 스페인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지요.


참고로 세르반테스의 집 바로 옆에는 안테사나 병원 (구. 자비의 성모 자선병원)이 있어요. 연도가 무려 1483년 이랍니다. 내부는 몇 년째인지 모를 보수 공사가 계속되고 있어요. 병원 바로 옆에 의사의 집이 있으니, 당시 미겔의 아버지에게 수입이 괜찮았을거 같은데도 그렇게 어려웠다는 기록을 보면, 보이는게 다가 아닌가 봅니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해서 세르반테스의 생가 지상층을 같이 봤어요. 다음엔 1층으로 올라가서 이어 소개해 드릴게요. 응, 2층 아니야? 라고 할 수 있는데, 유럽의 1층은 우리의 2층이에요. 그럼 우리의 1층을 여기선 뭐라고 할까요. 0층, 지상층, 아래층 등의 이름으로 부른답니다. 엘레베이터에도 0, PB, B, R 등 저마다 다 다르게 나와 있어서 헷갈리곤 하지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할 수 있는데요. 답은 너무도 심플하게 그냥, 물어본답니다. 여기서는 물어보는 걸 절대 주저하지도 않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아요. 내가 살아온 환경은 당신이 살아온 것과 다르니 나는 모르는게 당연하고, 그걸 아는 당신은 나에게 알려주는게 맞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이 사람들에겐 자리잡혀 있어요. 단일문화가 아닌 워낙 이민족과 섞여 살던 문화, 방대한 크기의 땅에서 서로 독립적인 문화가 생성되었던 배경이 그런 의식을 자연스레 자리잡게 하지 않았나 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Hasta luego! (아스따 루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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