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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n 06. 2021

정情은 스페인에도 있다

실은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한량으로 매일 쉬는 날이라지만 그래도 금, 토, 일을 맞이하는 느낌은 직장인 때 못지않다. 오히려 더 들뜬다. 오늘은 어떤 activity를 해 볼까 하면서, 밤늦게까지 무얼 하든 이해받고, 용서되는 마법의 날이다. 아, 물론, 이미 평일에도 별 다를 바 없이 늦게 자고, 하고 싶은 거 하며 보내곤 하지만 그래도 평일보다 주말은 미안함이 덜 느껴진다는 뜻이다. 


토요일이다. 두 아들 녀석의 기말 평가도 끝났다. 마드리드 시내 평가가 남아 있지만 그건 보름 후라서 마음의 여유마저 있다. 마침 렌터카 업체에서는 15% 할인도 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래서 미리 빌려 놓았다. 날씨를 체크 못한 건 실수였다. 차를 빌리러 가는 길에서부터 날씨는 우중충했다. 하지만 날씨가 대수랴. 이미 마음은 다섯 시간 걸릴 그라나다까지도 갈 기세였다. 작심하고 차를 빌려놨기에 어디로든 나가야 했다.


어느곳으로갈까요알아맞춰봅시다딩동댕. 화창한 날씨라면 마드리드 근교 내 세고비아, 아랑후에스, 엘 에스꼬리알 등 고심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그러면 갈 곳은 한 곳뿐이다. 사계절 어느 때에 가도 멋진 곳, 톨레도Toledo다.




아내는 톨레도의 웅장함을 사랑한다. 이곳 알칼라 데 에나레스로 이사 오기 전 알아보던 곳이 톨레도였을 정도로, 아내는 역사의 정취가 한껏 묻은 이 도시를 사랑한다. 하긴, 유서 깊은 천년의 고도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내는 이곳에 가족과 와서 숙박한 것은 물론, 친구들과도 와서 시간을 보냈고, 차만 빌렸다 하면 항상 들리는 곳이었다.


나도 물론 이 도시를 사랑한다. 가이드로서 마드리드 근교에서 이 도시만큼 매력 가득한 곳도 없을 것이다. 풀고 풀어도 끝이 없는 이야기가 천일야화를 이루고, 대성당의 화려한 볼거리만큼이나 거리의 칼이며 금 공예품들 또한 눈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냥 노트르담의 꼽추처럼 톨레도의 한량이 되어 자리를 잡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이들에게 톨레도는 소코트렌이라는 관람열차를 타고 돌아보던 추억 어린 곳이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 성벽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엄마 아빠의 분위기에 같이 젖은 곳이고, 틈만 나면 아빠의 열화 같은 요구에 엄청난 사진을 찍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누비며 숨바꼭질의 재미를 느끼던 곳이다. 




아이 셋과 함께 우리가 달려간 곳은 국영호텔 파라도르 Parador다. 톨레도의 해발고도는 529m인데 그 보다도 백 미터 정도는 더 높아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호텔이다. 시간의 박물관으로 존재하는 톨레도 구시가 전체를 내려다보며, 한가로이 마셔보는 만사니아 차  de manzanilla (국화차)나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살짝만 넣은 꼬르따도 cortado 한 잔은 누가 봐도 영화 속 주인공으로 연출을 해 준다. 가족, 친구, 애인 등 사랑하는 이와 함께 와서 음료 한 잔이 주는 여유와 낭만은, 몇 번을 와도 완벽하고, 평생에 남을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한 번 출장에 대략 열흘 정도 소요되는 스페인 일주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톨레도 파라도르 호텔에는 한 달에 최소 두 번 정도를 방문해서 손님들과 격이 다른 식사를 즐기곤 했다. 사전 준비 확인부터, 시간, 인원, 테이블 위치, 식사 구성과 음료 확인까지 세세한 사항을 점검하는 동안 호텔 직원들과도 안면을 트고 이름을 익히기 시작한다. 일반 팀과는 다른 팀들이기에 부담이 큰 만큼, 보다 꼼꼼하고 면밀한 준비와 확인이 필요하기에, 서로 피곤한 일이지만, 몇 번의 일정한 경험이 누적되면서 상호 신뢰가 싹트고 그때부터는 '믿고 맡기는' 관계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과정을 누락하는 경우는 없다. 다만, 초반 때처럼 같은 사항을 더블, 트리플 크로스 체크하는 일은 안 할 뿐이다.


그렇게 친해지다 보니 새해 기념으로 예약을 하고 가족을 데리고 갔을 때, 언제나처럼 친절함은 기본이거니와, 아이들의 주문과 부탁에도 놓치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응대해 준다.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을 가장 쉽게 여는 방법은 자녀에 대한 관심과 칭찬인데, 스페인 직원들의 태도는 계산되거나 기술적인 트레이닝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배어나와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사가 끝나고 따뜻한 커피와 차로 입 안을 개운하게 하는 중에 웬 바구니가 하나 들어온다. 안을 보니 뭔가 한 가득이다. 아, 이런. 아몬드, 설탕, 달걀흰자를 넣어 말랑말랑하게 구워낸 과자인 마사판 Mazapán(마지팬)이다. 


사실 마사판은 우리 가족을 비롯한 한국인의 입맛엔 너무 들큰할 정도로 달아서 잘 맞지 않는다. 농담 삼아서 마사판 하나면 에스프레소 세 잔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스페인, 그중에서도 여기 톨레도에서는 이 마사판이 특산품이어서 현지인들은 한가득 사 가고 커피숍에서도 달걀노른자만으로 만든 예마yema와 함께 사 가곤 한다. 어찌할 것인가. 우리 가족을 생각해서 특별히 내어 준 것인데. 일단 먹을 수 있는 만큼 먹고, 나머지는 냅킨에 말아 얼른 가방에 넣어 두었다. 호텔 식당에서 이런 대접을 다 받다니, 한국의 정을 느낀 순간이었다.




마지막 팀을 공항에서 배웅한 지 1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톨레도는 지역 격리로 이동금지 상태였다. 톨레도 가는 길에 계속 보이는 꾸물거리는 날씨와 구름은 쉬면서도 쉬는 게 아닌 불편한 내 마음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톨레도를 가는 마음은 마치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톨레도의 파라도르 호텔을 가는 건데, 이상스레 마음 한편에서는 거기서 보던 직원들의 미소와 친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파라도르 Parador에 도착했다. 동시에 아이들은 그곳에서 만난 아빠의 버스기사 알베르토 Alberto를 말했다. 순간 너무도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잠시 사진 한 두 장만 남겼을 뿐인데. 아이들은 구글 포토다. 같이 있는 동안엔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자기들만의 메모리 속에 고스란히 담아 두었다가, 예전 장소에 다시 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자동 재생해 내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 1년 전, 2년 전 사진을 떠올려 주듯 말이다.


코비드의 광풍이 휩쓸고 가는 동안 문 닫고 폐업한 호텔도 많고, 용도 변경된 곳들, 이미 팔리고 내부 집기가 다 옮겨져 을씨년스럽게 남겨진 동네의 호텔이며 상점을 많이 봐서 그런지, 막상 계획했던 곳에 오면서도 기우가 들었다. 하지만, 즐비한 차들을 보니 정말 기우였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호텔 로비를 통과해 커피숍 테라스로 나오자, 아내의 사랑이자, 나의 정감 어린 톨레도가 말을 걸었다. "오래 기다렸지? 나도 너 보고 싶었다."

휴대폰으로 한동안 사진을 찍었다. 마치 처음 와 본 것처럼.


톨레도 시내 파노라마 전경




음료를 주문하고 화장실에 가는 길에 호텔 직원 인디Indy 씨를 만났다.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로 누구보다 싱그럽게 웃고 상냥하게 대하는 그는 언제나 볼 때마다 활력을 돋게 하는 당찬 분이다. 서로 마스크를 끼고 있는데도 대번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알아봤다. 신기해라. 올라, 께딸과 함께 나누는 몇 마디의 안부 인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살아 있음에, 스페인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음에,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 두려웠음과 감사, 그리고 반가움의 바람을 각자에게 한껏 불어주었다.


직원 인디 씨가 제공한 빵

막내는 신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두 아들은 큐빅 재미에 빠져 있고, 아내와 나는 서로 멋진 톨레도 전경에 감탄하고 있는데, 인디 씨가 오더니 기다란 접시를 테이블에 놓아두며, "이건 너희 가족을 다시 본 것에 반가워서 내가 매니저에게 부탁해서 가져온 거야. 호텔에서 제공하는 거니까, 돈 낼 필요 없어. 맛있게 먹고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한다.  


세상에... 안 그래도 출발 전에도 전혀 예상도 못했던 감사한 일이 있어 어안이 벙벙한데, 이번엔 현지인에게서까지 이런 생각도 못한 선물을 받을 줄이야.


바삭한 패스트리 속 달지는 않지만 촉촉한 감촉의 커스터드는 그간 감정의 동요를 가급적 최소화하며 어떻게든 서로 다독여 가며 잘 견뎌낸 나와 아내에게 앞으로도 우직하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라며 격려해 주는 듯했다. 


인디 씨와 나는 1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 번 못 봤고, 볼 수도 없었고, 그렇게 자연히 잊힐 수도 있는 사이. 실은, 업무로서 만났으니 그래도 전혀 문제가 안 될 사이였다. 1년이 넘도록 아직도 재기의 기미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여행업 속에, 잃어버린 경제력을 회복하고 다시 손님을 이끌고 와서야, 으레 그러듯 반갑게 인사하고 잘 지냈냐며 안부를 나눌, 그럴 사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나는 현지인도 아니고, 외국인이니까. 친구도 아니고 잠깐씩 보고 지나가는 외부의 동료이자 손님이니까.


1년 넘게 얼굴을 못 봤으니 얼마든지 깜빡할 수 있다. 게다가 다시 본 거라 해도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알아볼 얼굴은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다. 손님도 아닌 단출하게 가족만을 데리고 나와, 음료 밖에 주문하지 않았는데, 이런 환대를 해 주다니, 정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리하고 계산하고 인사까지 하고 나가는 길 내내 인디 씨의 친절과 배려, 환대와 정감 어린 말이 잊히지 않았다.




흐릿했던 구름은 먹구름이 되어 비를 뿌렸다. 톨레도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타호 강 속에 떨어지는 비에 그간의 갑갑했던 마음을 씻었다. 세상은 살만하고, 그 시작은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정이다. 정은 한국인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따스함을 품은 사람이라면,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엔 항상 존재하는 것이 정情이었다.


인디 씨의 깜짝 선물, 나도 그런 위로와 따스함을 건내는 소박한 선물을 하나 전하고 싶어 졌다, 아니, 전해야겠다.


We must find time to stop and thank the people 
who make a difference in our lives.
-John F. Kennedy-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분들에게
멈춰서 감사할 시간을 찾아야합니다.
-존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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