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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n 07. 2021

같은 초록색은 없다

그래서 자연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두 녀석들을 데리고 도보 10분 거리의 유치원과 학교로 등하교를 한다. 오전 오후는 등하교만으로 시간이 다 간다고 느껴질 정도다. 하릴없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 마냥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자괴감을 느낄 때도 제법 있다.


편도 10분, 왕복 20분이니 가벼운 산책코스로 여길 법도 하지만, 300미터 가량 경사가 살짝 있는 오르막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면 은근 종아리가 당기거나 발목이 뻐근함을 느끼기도 한다. 도보 10분 밖에 안 되는 거리라면, 그냥 천천히 가도 될 것을 굳이, 왜 파워워킹하듯 빨리 걷느냐,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추가 설명을 하자면, 닷새 중 나흘은 항상 시간에 촉박하게 나가기 때문에 그렇다.


하, 많고 많은 것 중에 맨날 교실 들어가는 시간 일이십 초를 남겨두고 종종걸음으로 가야 하는 이런 것 마저 굳이 나를 닮아야 하는가 하고 후회해 보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 마저도 유전자의 힘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 와중에 간간이 막내가 자기 힘없다며 업어 달라고 할 때면 정말 10분 거리를 이미 10번은 왕복한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한다. 이전에 하루 2만 보도 능히 걷고 또 나가던 가이드 시절의 체력이 안 믿긴다.

 

그런 와중에 아침마다 초4 아들과 유2 딸은 (여기는 유치원도 3, 4, 5살을 1, 2, 3학년으로 나눈다) 왜 꼭 내 오른손을 잡으려고 쟁탈전을 벌이는 지도 의문이다. 내 왼손이 그렇게 두 번 못 잡아 줄 정도로 못 생긴 거니, 아님 오른손 잡으면 가다가 개똥을 밟아도 신발에 안 묻는 마법이라도 생긴다는 거니. 도대체 그 어떤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반복되는 패턴. 결국 누군가 하나는 (언제나 밀리는 건 막내) 울며불며 빽빽 소리를 질러대며 끝내는 것 또한 도통 이해가 안 갈 일이다.


오전 등굣길 10분 사이에 내 기력은 이미 아침에 쓸 할당량의 10% 밖에 남아 있지 않아 빨간불이 들어온다. (이 세상에 자녀를 둔 모든 학부모님들, 존경합니다) 얼른 집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타서 안방 작업실(이라 하기엔 작디작은 책상과 등받이 없는 긴 의자뿐이지만)에 들어가 큰 창문 너머 아름드리 나무를 보며 글쓰기와 필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 걸음을 재촉하는데 집 앞 공원의 관목과 풀들이 엉겨 있는 게 보였다. 그저 이름 모를 풀로만 여겼던 그 풀잎들이 저마다 다른 색으로 보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른 풀이니 색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학생 시절 나무며 풀을 그릴 때는 그저 다 초록색 크레파스, 또는 연두색 물감으로만 칠하던 내게, 그 순간은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이름 모를 풀들이지만, 저마다 진하고 옅음의 차이며, 그 마저도 빛을 어느 정도로 받느냐에 따라, 심지어 바람이 어떻게 불어 지나가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색으로, 저마다의 고유한 색상을 갖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들어선 안방 창가에서는 보다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의 무성한 가지에 달린 빽빽한 잎들은 결코 초록색이다 라는 한 단어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한 나무에서 같은 뿌리에서 동일한 기둥에서 틔워낸 잎들임에도 색은 정말 달랐다. 만약 전부 같은 색이었다면 코 앞에서야 구분이 될 뿐 몇 발자국 앞에서는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르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공장에서 양산해 내는 <제품>이 아닌 손끝에서 탄생하는 <작품>은 그래서 복제가 안 된다. 모작이 있고 가품이 있을 뿐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가치는 없다. 


잘 안 풀리는 일, 부진한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에, 누군가는 주식으로 대박이 나고, 부동산으로 재미를 보고 등등의 뉴스를 접하든, 주위에서 누구는 코로나 기간에도 잘 나가더래 하는 소식을 들으면 부럽거나 질투가 나기 전에, 나는 왜?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걸 나무는 느긋이 기다리며 알려주는 것 같다.


그 어느 누구도 똑같지 않다고. 나만의 작품으로 멋지게 설 것인지, 남들과 똑같아지는 제품으로 설 것인지는 다른 누가 아닌 결국 나에게 달려 있음을 말이다. 다시 눈을 들어 창 너머를 물끄러미 보니, 매끄러운 나뭇잎이 빛을 받아 반짝이다.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그 빛은 서로서로에게 전달된다. 


내게도 그런 빛이 있을까. 있을까 없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빛은 외부에서 받는 것이었다. 외부의 빛을 영원히 가지려고 하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빛을 받는 동안 눈부시다고 화내지 말고, 빛이 없다고 낙심해 말고. 나무에게서 지혜를 배운다. 같은 초록색은 없다. 그러기에 자연이고, 그러기에 나는 남이 아닌 나로서 오늘을 묵묵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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