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n 11. 2021

당신이 보낼 스페인의 하루 part II

스페인의 언어와 식사문화 이야기

한국의 박호, 박희 부부가 스티브를 보러 스페인의 빠꼬, 빠끼 부부 집에 머물면서 생기는 일, 이어갑니다.


스페인의 언어습관

ㅡ스티브, 이분들 설마 우리 식사시간도 모르고 온 건가요? 에이, 기본은 알려줬어야죠. 주인 내외가 빙긋 웃으며 묻습니다.

ㅡ아, 깜빡했네요. 이제부터라도 알면 되죠, 뭐. 스티브는 미안하단 말 없이 씩 웃고 맙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죄송하다는 말(Lo siento 로 시엔또)을 여간해선 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ㅡ아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넌 실수 안 하고 사냐, 깜빡할 수도 있는거잖여. 1755년 리스본 대지진도 아닌데 그냥 좀 넘어가. 이런 식이에요. 


참고로, 리스본 대지진은 만성절인 11월 1일 아침에 규모 8.5~9.0의 초강진으로 당시 사망자만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무려 6만 명에 달했던 자연재해였습니다. 스페인 남부 해안도시 카디스에는 무려 20미터 높이의 해일이 일었고, 진앙지에서 6100km 떨어진 캐리비안까지 그 여파가 미칠 정도로 무시무시했지요.


같은 경도 상에 있는 영국에서는 대화가 일단 sorry로 시작해 모든 문장에 추임새 마냥 sorry를 남발할 정도로 쓰는 데 비해, 스페인에서는 정말 마땅히 미안해야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조차 그냥 별 다른 언급 없이 넘어가는 게 있습니다. 실은 스페인에서 lo siento는 미안하다는 표현보다는 "유감입니다"로 받아들입니다. 제법 격식을 차린 표현이 되어서, 보통은 perdón 미안해 (뻬르돈) 이라고 말하며 휙 지나곤 해요. 그래서 그 마저도 뭔가 미안하기보다는 그냥 '어, 있잖아.'는 느낌을 더 받곤 합니다. 정말 낙천적인 스페인 사람들, respect 입니다.  


특히나 업무가 아닌 사적인 관계에 있어서는요. 약속시간에 10분은 기본이고 대놓고 30분이나 늦어도 별로 (아님 전혀?) 미안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기다리던 사람 역시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가는 터라, 여기에 살면 스페인 사람들은 전부 대인배로 보이고, 저는 그깟(?) 일이십 분에 옹졸한 인간이 된 거 같아서 황당했던 적이 제법 있을 정도예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늦는 걸까요? 

ㅡ그야 늦을 이유는 백 개도 더 댈 수 있죠. 

  

차로 오다 보면 (당연히 누군가의 사고로) 길이 막힐 수도 있는 것이고, 지하철이 제시간에 안 왔을 수도 있고, 하다 못해 본인 앞사람이 스마트폰만 보며 걷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부딪혀서 늦어질 수도 있다는 등,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지연이 될 요소인 셈이지요. (수다왕인 만큼 핑계에도 왕임) 약간 과장이 들어가긴 했습니다만, 정말이지 여기 살면서 시간을 준수한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시간 안 지키는 게 오히려 흔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정도고요. (기차와 배는 물론, 비행기도요!) 


스페인 사람들의 수다스러움은 태어나자마자 만렙(최고의 레벨이라는 게임용어)을 찍고 나왔는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기본 탑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긴 사람 이름과 거리 이름들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대수롭지 않게 부르는가 봐요. 오죽 말이 많으면 유럽 사람들이 농담 삼아하는 얘기가, 스페인 사람들은 말이 (너무) 많아서 불륜이 날래야 날 수도 없다 라고 할 정도예요. 불륜의 남녀가 약속 시간 정해놓고 오는 길에 그만 서로 만나는 사람마다 하도 수다를 떨어대는 바람에, 정작 두 당사자는 못 만났더라는 식으로 말이죠. 


영어로 중얼중얼을 표현할 때, 블라블라 blah blah (또는 프랑스어로 bla-bla)라고 쓰잖아요. 그 말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아시나요? 학문적으론 그리스어 bar bar로 의미없는 소음이란 뜻에서 나왔답니다. 참고로, 독일 야만족을 뜻하는 barbarian도 여기서 나왔지요. 게르만 족이 하는 게 도대체 뭔 소린지 로마인들로선 알 수가 없었을테니까요. 

하지만, 현실에 맞춰 더 가까운 말에서 유사성을 찾아볼까요. 미국의 제2언어이자 히스패닉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보자면, 'hablar 아블라르'는 말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 정도면 스페인 사람들이 얼마나 쉬지 않고 종일 말할 능력을 가졌는지가 충분히 이해하시고도 남으실겁니다.



스페인의 식사문화

그렇다면 스페인 사람들은 하루에 몇 끼를 먹을까요? 

우리나라에선 은퇴 이후 삼시세끼 집에서 다 챙겨 먹으면 구박 받는다잖아요. 어휴, 그러지 마세요. 

스페인이 아닌 한국에 계신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데요. 

왜냐하면 스페인에서는 하루가 다섯끼거든요. 별 다섯 돌침대 아니고요, 하루 다섯끼 스페인입니다.


얘들 배가 고무도 아닌 라텍스라도 되는 거라 그런 걸까요? 시간대 별로 한 번 알아보시죠.

일단 아침 7-9시경에 먹는 걸 desayuno 데사유노, 아침식사라고 합니다. 단어 구조가 영어랑 비슷해요. 영어의 breakfast는 break깨다 + fast단식 이잖아요. 스페인어는 des-반대를 뜻하는 접두사 + ayuno단식 이랍니다. 단식을 무엇으로 깰까요?


아침식사로는 간단하게 구운 빵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방금 갈아낸 신선한 토마토를 얹어 먹는 pan tostada con tomate (빤 또스따다 꼰 또마떼)입니다. 여기에 우유가 들어간 커피, 꼰 레체 con leche (=with milk, 라테)를 보통 먹습니다. 아니면 츄로스churros 몇 개에 핫쵸코를 듬뿍 찍어 먹기도 하죠. 


그런데 9시에 사무실에 일하는 친구들이 9시 이전에 출근버스를 타고 회사에 오면 보통 8시 3, 40분 정도에 도착하거든요. 그러면 사무실엔 노트북 킨 다음 일을 하는 것... 이 아니라, 그 시간을 이용해서 회사 구내식당이나 근처 까페에 동료들과 가서 간단히 먹고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만 배가 부르게 한상 차려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뭐 하나 먹긴 먹었다 정도예요.


말 그대로 빵 한 조각에 커피 한 잔 먹고 와서 일하려니, 오전 11시 정도가 되면 금방 배가 꺼지기 않겠어요. 안 그래도 말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니까요. 그렇다고 벌써 점심을 먹는 건 아니고요, 간단한 아점을 먹습니다. 그걸 여기서는 Almuerzo 알무에르소 라고 부른답니다. 영어로 lunch로 나와 있기도 하지만, lunch 보다는 brunch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먹는 건 역시나 간단하게 달달한 빵이나 샌드위치에 주스나 커피를 마십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이 시간에 30~45분 정도 몰아서 쉬면서 간식 시간을 가집니다. (교육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쓰겠습니다)


간식 먹고 올라와서 다시 일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오겠죠? 11시경에 간식을 먹었으니 점심 먹는 시간이 우리처럼 12시에 먹는 건 불가능하겠지요. 이 친구들 점심은 그래서 오후 2시입니다. 잘못 쓴 거 아니냐고요? 아뇨, 맞아요, 오후 2시 점심 Comida 꼬미다 입니다. 이들에겐 점심이 제일 중요한지 점심 식사도 Comida 이지만 일반적인 식사도 Comida 라고 합니다. 외국계 회사의 경우엔 좀 당겨서 오후 1시나 1시 30분부터 먹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쓰고 나면, 오후 업무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오후 5~6시경에 다시 배가 꺼지죠. 모든 일을 입으로 거의 다 하니까요. 퇴근 시간도 되고, 아이들도 학교에서 돌아옵니다. 우리라면 저녁을 먹겠지요. 하지만 스페인은 하루가 길어서, 다시 말해, 태양이 오래 떠 있어서 그 시간에 저녁을 먹으면 여전히 훤한 대낮에 리듬이 깨집니다. 그러니 다시 간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게 오후 대여섯 시에 먹는 간식을 Merienda 메리엔다 라고 합니다. 아이들 하교 길에 하몽이 들어간 샌드위치에 우유, 주스 등을 먹기도 하고, 간단히 과일로 먹는가 하면, 집에서 아예 스파게티를 해 먹기도 합니다. 


과일에서 스파게티까지 간식이라 하기엔 범주가 너무 크지 않나요? 그럼에도 중요한 건, 무엇을 먹든 간에 이 모든 것은 저녁 식사가 아니라 간식으로 친다는 것이지요. 이 점이 생각보다 당황스러워요. 


관련된 일화 하나, 스페인에서 현지 기업체에 영어 출강을 하다가 스페인 학생들의 영어 과외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지요. 오후 5시에 방문했는데 볼로네제 파스타 냄새가 나길래, 오호 너 저녁 먹는 거니 물어보니, 아이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선생님 스페인 산 지 얼마나 됐어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 5년은 됐지"라고 했죠. 그러자, 아이 가라사대 


ㅡ그런데도 선생님은 스페인 사람들이 저녁을 언제 먹는지 모르시나요? (어머, 진짜 모르시나 봐?)

ㅡ아니, 알지. 하지만 너 파스타 먹었잖아. (빵이나 과일이 아니고, 요리잖아, 요리!)

ㅡ에이, 스티브, 그게 어떻게 저녁 dinner이에요, 간식 eat between meals이죠!     

ㅡwhat the...? (헐?)


과외 후에 학생 어머니 하고도 이렇게 먹고도 정말 다시 드시냐고 매우 진중하게 물어본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무슨 이런 멍청한 질문이 다 있냐는 듯한 눈으로, por supuesto 당연하죠 라고 딱 끊으셔서 더 물어보기가 민망했던, 어리벙벙한 순간이 있었네요. 사견으로는, 사실상 뭐든 습관인 듯합니다.


자, 그렇다면 빠끼 빠꼬 부부가 9시에 저녁, Cena 쎄나 먹는, 아니, 먹어야만 하는 이 시츄에이션이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게 되어버리는 놀라운 일이 펼쳐지는 것이지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와 같은 대도시의 식당들은 8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위해 저녁 6-7시에도 식당 문을 열어주긴 하지만, 그 외의 도시들은 정말 빨라야 오후 8시이고, 보통은 밤 9시부터 문을 연답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보통 질문은 그렇다면 스페인 사람들은 대체 잠을 몇 시에 자는거지 하게 됩니다. 밤 9시에도 먹고 10시에도 저녁을 먹으니 집에 가서 씻고 나면 이미 밤 11시가 넘겠죠. 그렇다고 스페인 사람들이 아가모토의 눈을 소유한 닥터 스트레인지도 아니고, 시공간에 제한을 받는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렇죠, 잠은 자정께에 자고 다음날 아침 7시에 다시 출근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침을 회사 가서 먹는 일이 자연스럽게 반복이 되지요. 수면 부족도 겪고요. 야간자습과 벼락치기로 일찍이 학생 때부터 수면 부족에 체질화한 데다 야근 및 밤샘 작업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에선 그 정도쯤이야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식습관은 사실 자국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답니다.


이렇게 먹게 된 게 꼭 일조량이 길어서만은 아니거든요. 일조량이 긴 이유도 실은, 잘못된 시간대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하루 다섯끼를 먹게 된 것도, 저녁 시간을 너무 늦게 먹는 관습도 불과 7, 80년 정도밖에 안 된 짧은 역사를 갖고 있어요. 왜 잘못된 시간대냐고요?


앞서 언어습관 편에 영국 소개했던 거 기억하시죠. 스페인이 영국과 같은 경도상에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그리니치 천문대 시간인 GMT를 기준으로 해야 맞거든요, 원래는. 바로 왼편에 국경을 둔 포르투갈처럼요. 하지만 스페인은 굳이 2500km나 떨어진 세르비아와 같은 시간대인 CET 유럽 대륙 표준시를 기준으로 했어요.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한 걸까요?


바로 스페인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 1936-39 당시 프랑코 독재에 의해서입니다. 좌파 인민전선과 우파 반란군 사이의 내란에서, 우파였던 프랑코는 독일 나치로부터 무력의 힘을 빌려야 했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피카소의 역작으로 유명한 <게르니카>이고요. 협공을 해야 하는데 시간대가 다르니 자꾸 어긋나고 불편이 발생하자 스페인이 아예 독일과 동일한 대륙 시간으로 조정해 버린 것이죠. 


일반 민간인들은 시간이 바뀌어진 줄도 실은 몰랐죠. 그저 평소처럼 7시에 아침 먹고, 1시에 점심 먹고, 그리고 낮에 너무 더우니까 한숨 자고 다시 오후에 일하고서 오후 7-8시경에 저녁을 먹었을 뿐이에요. 한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시간씩 늦춰져 버린 거지요. 세상에, 이런 대사기극이! 문제는 이게 세계2차 대전이 끝나고도 안 바뀌었고, 프랑코의 사후에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일부에선 시간을 바꾸자 했었고, 2016년 라호이 총리 당시 새로운 근무시간 계획으로 스페인 전국은 열띤 토론으로 들끓었고요. 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미 총칼 아래 굳어진 관습이라 이를 되돌려 놓기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스페인에 정착한 지 9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저녁 식사 시간은 저에겐 힘든 일이에요. 먼저 먹고 가자니 기분이 안 나고, 그렇다고 굶고 가자니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프게 되죠. 반대로 스페인에 있다 다른 나라로 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스페인 사람들은 다른 나라가서 왜 이렇게 하루를 일찍 마감하려는 것인지, 식사도 너무 빨리 끝나고, 하루도 너무 짧다고 오히려 툴툴대곤 합니다. 뭐든 상대적인 거 아니겠어요.


저녁 식사를 외식으로 하는 경우엔 적은 양으로 뭔가를 계속 주섬주섬 먹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본식사 전에 가볍게 먹는 문화가 바로 타파스Tapas 또는 핀쵸스Pintxos 에요. 이건 이것만을 두고서 따로 언급을 해야 할 정도로 스페인의 독특한 먹거리 문화라서 3부에 가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종일 먹기만 하면 일은 언제 하고 낮잠 siesta 시에스타는 도대체 언제 자는 거야? 하실 수 있는데, 이 역시 3부에 가서 소개해 드릴게요. (저도 쓰고 나니 배가 살짝 고파져서 간단히 뭐라도 요기를 해야겠네요)



스페인 음식 la cocina española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보낼 스페인의 하루 part 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