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과 기분의 함수관계
심리학 전공은 아니지만, 해외 거주 15년 생활 속에 한국분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습득한 게 하나 있다. 한국인인 우리는 감정 이전에 기분 이란 단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기분은 하루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기분[氣分]이란 대상ㆍ환경 따위에 따라 마음에 절로 생기며 한동안 지속되는, 유쾌함이나 불쾌함 따위의 감정을 말한다. -표준국어대사전
애당초 기氣는 영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동양의 고유 사상이 담긴 단어다. 거기에 우리나라 어휘는 기氣 하나에서 온갖 단어를 파생시킨다 : 기운, 기분, 기력, 기세, 기죽다, 기막히다, 기똥차다...
기분, 감정, 정서, 느낌 등 인간의 감정 세계를 보다 세밀히 표현하는 여러 단계의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 단어와 전문용어의 세계는 심리 전공자 분들께 맡기기로 하고, 나는 형이하학적으로 내려와 뜨거운 나라, 스페인의 물리적인 온도차에 따른 감정 기복에 대해 가볍게 써 보고자 한다.
세상 어느 나라 여름 치고 안 더운 나라 있겠는가 마는, 스페인의 여름은 정말 뜨겁다.
그렇다고 사막처럼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보내기가 쉬운 편이다.
거리에서도 일단 그늘만 찾으면 된다. 마술이라도 부려놓은 거 마냥 땡볕 아래에선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뜨거웠는데도, 그늘로만 가면 보이지 않는 선을 두고 전혀 다른 시원하고도 서늘한 공간이 나온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백번 글로 읽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독자분들께 죄송하고, 답답한 마음이다.
단체 관광객을 데리고 그 뜨거운 7, 8월 스페인 곳곳을 다니는 중에도 그늘, 특히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만 가면 저마다 놀라워한다 :
"아니, 어쩜 여긴 이렇게 시원해요?"
"세상에, 에어컨이 필요 없네."
"와, 정말 신기해요!"
우리나라의 여름은 찜통더위로 유명세를 날리는 까닭에 사실상 그늘로 간다 해도,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정도지, 한증막 같은 습도는 그늘 아래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볕이든 그늘이든 이미 땀 때문에 셔츠 소매며 복부는 등은 살에 치덕치덕 달라붙은 지 오래다. 한국에서 여름이면 으레 불쾌지수를 확인했는데, 스페인 일기예보에선 단어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습한 기운 일절 없이 건조함만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여름이라니. 그 점 때문에 스페인이 싫다가도 떠날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엉덩이 붙이기 바쁘게 다시 떼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내내 그늘로만 갈 순 없다. 허리와 다리는 그늘이지만 머리와 얼굴은 땡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헉헉 대며 이동을 거듭한다.
구경하는 건 좋은데, 몸은 힘들다. 그렇다고 빡빡한 일정 속에 속도를 늦출 수도 없고 아니 움직일 수는 더더욱 없다. 이쯤 되면 제일 앞서가는 가이드에게 한마디 던지고 싶어진다.
ㅡ왜. 나를. 이런 곳에. 데려가는 거죠? (마침표는 열 때문에 숨이 차서 끊어 말한다는 의미다)
누군가 대신 답을 한다.
ㅡ이 사람아, 이건 당신이 선택한 거잖아. 가이드가 무슨 죄야, 이 땡볕에. (아아, 감사합니다, 손님)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어 넋두리만 한다.
ㅡ아휴, 그래도 그렇지, 누가 이렇게 뜨거운 줄 알았나요, 뭐...
여행에서 내가 배우는 건 해당 지역의 역사, 지형의 특색, 건축물의 양식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공부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저마다의 인품이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서, 어렵고, 힘들고, 불쾌하고, 짜증 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민낯이 드러난다. 내 가족, 연인, 친구를 제외하고 누구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루 이틀은 서로 조심하지만, 사흘 째가 되면서부턴 슬슬 숨겨왔던 나의~ (feat. 클래지콰이)가면이 벗겨지면서 모든 감정이 언행을 통해 거침없이 나타난다.
버스를 타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에어컨 틀어 달라 난리고, 어서 물, 물, 물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다 십 분만 지나면 이번엔 추워 죽겠다며 에어컨 꺼 달라고, 약하게 해 달라고 야단법석이다. 스페인의 더위가 그렇게 체면이고 뭐고 집어던지게 만들 정도로 가혹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당장의 열기에 어른이고 어르신이고 나이를 잊고 아이가 된다. 그럴 때마다 스페인 버스 기사는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되돌려 본 사람 마냥 익숙하단 듯이 웃음까지 띄워가며 "Sí, vale." (씨, 발레 - ok 란 의미의 스페인어입니다. 절대 욕 아님)로 여유 있게 답한다.
온도 하나로 사람의 감정이 열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춥게 (시원하게) 차 안에서 보내고 다음 목적지에 내리면, 그늘이면 별 말 없지만, 노지면 뜨겁다고 요동을 친다. 기분과 감정이 잠시 몇 분을 두고 그렇게 오락가락할 수가 없다. 그때만큼은 한국인처럼 매순간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충실한 국민은 없는 것 같다.
반대로 한겨울이 되면 어떠하겠는가. 굳이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상상하는 그대로다. 사실 스페인은 한겨울이라 해도 북부 대서양 연안이나 산악지방을 가는 게 아닌 이상, 대부분의 관광지는 영상 3도 이상을 유지한다. 혹한기 훈련처럼 영하 10도 20도의 엄동설한에서 극기훈련을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인내심은 금방 떨어지곤 한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신사적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다스릴 줄 알고,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본인의 품위를 잃지 않는 분들. 그들이라고 더위를 모르며 추위를 못 느끼는 걸까.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통제하지 못하는 날씨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절제한다.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면을 바라본다 : "덥다 해도 그늘이 있어 다행이네요." "엄청 추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영하가 아니라서 괜찮아요." 어린 학생조차 이렇게 얘길 할 때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를 다시 보게 된다.
그들은 스승이다. 기온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오르내리게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인격의 마스터다. 스페인에선 우리나라 못지않게 체면을 차리는 점이 있다. 그래서 힘들다 해도 힘들다고 곧이곧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여유 있게 껄껄 웃으며 '이까짓 더위쯤이야 문제없어!'하는 사람들이다. 나중에 얼른 달려가 얼음물을 들이켤지언정, 상대방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는다. 그도 나 못지않게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먼저 힘들고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건 실례다.
요즘엔 지구 온난화 때문에 기상 이변이 눈에 띄게 늘었다. 눈 한 번 오지 않던 수도 마드리드에 반세기 만에 폭설이 덮쳐 일주일 가까이 교통이 마비되었다. 반면, 여름은 이전만큼 펄펄 끓지 않는다. (이 점은 다행이다) 세상이 어찌 변하건 스페인은 여전히 정열이 넘치는 땅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 스페인을 잘 즐기는 비결은, 어쩌면, 단숨에 모든 걸 다 태워 버릴 기세를 가진 순간의 열정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감정과 기분을 잘 다스리는 일에 있지 않을까.
사진 설명: 바야돌리드 시내 거리에 설치한 천막. 천막 아래에는 그늘이 생겨 보행자들이 쾌적하게 다닙니다. 보통은 천막만 치는데, 바야돌리드는 식물까지 얹었습니다. 돈이 좀 있다는 얘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