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스페인에선 그러다간 뼈도 못 추리... 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상당히 몰상식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습니다.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국모, 이사벨 여왕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1492년 스페인의 재통일 왕국 건립입니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8세기 서고트 왕국 통일보다 이때의 통일을 최초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나라의 통일신라 676년 건립에 비해 늦네요.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페란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이 결혼하면서 스페인 국토 회복운동, 레콘키스타 Reconquista를 대대적으로 일으킵니다. 두 부부는 카톨릭 교도로 얼마나 이슬람 척결에 열심을 내었는지, 이베리아 반도 재수복 이후 알렉산더 6세 교황에게 카톨릭 왕들 Reyes Católicos 이라는 칭호까지 받습니다. 지금도 스페인 도시 곳곳에는 카톨릭 왕들의 길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지요. 그들의 대 이슬람 전투는 전 유럽이 참여하는 십자군 전쟁에서 교황이 열외를 시킬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남편의 보급을 책임지며 든든한 후방을 맡던 이사벨은 아예 전면에 나섭니다. 그라나다 탈환 전까지 전투복을 벗지 않겠다며 실천에 옮긴 일화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여걸이었어요. 그라나다를 가진 후, 그 땅은 남편의 땅 아라곤이 아닌 자신의 왕국 카스티야로 편입시켰지요.
또한 꿈 많은 뱃사람에 불과한 이탈리아 사람 콜럼버스를 만나,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스페인의 힘을 팽창시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카톨릭 열혈신자인 그는 스페인 카톨릭 교회까지 정화작업에 두 팔 걷어 부칩니다. 진정 스페인을 낳은 국모이자 영웅이라 불릴만하네요.
제목의 배경 그림 역시 그분을 그려냈습니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가 1882년에 그린 <그라나다 항복>입니다. 좌측에는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술탄 보압딜이 성 열쇠를 쥐고 있고, 우측에는 붉은색 옷의 페르난도 2세와 백마 위에 왕관을 쓴 위풍당당한 모습의 이사벨 1세가 있습니다. 진정한 통일을 이루고, 스페인 왕국의 당찬 출발을 알리는 그림이지요.
출처: 구글 이미지
스페인의 황금 세기라 불리는 16세기에서도, 21세기 현재까지도 스페인 사람의 입에는 남편 페르난도보다 아내 이사벨이 더 자주 회자됩니다. 스페인어 구글 검색만 봐도 이사벨 여왕의 결과가 약 1억 건 이상 더 많습니다. (3억 9천 vs 2억 8천 건) 또한 스페인은 물론 중남미 스페인어권에서도 이사벨이란 이름은 언제나 가장 많이 쓰이는 여성 이름 상위 5위권에 들어갈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막내딸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서도 이사벨이란 이름이 제법 눈에 띄네요.
여인천하 스페인과 미팅의 정석
스페인의 정계에는 이사벨의 DNA라도 흐르는 걸까요? 2021년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내각 구성은 6명의 남성과 무려 11명의 여성입니다. 이는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여성 비율입니다. 스페인 여성의 파워는 실제 업무 미팅에서도 드러납니다.
TV 부서 전체 key account manager 와의 유통, 물량, 프로모션 등 meeting 당시 일화입니다. 일단 스페인 회의의 특징 중 하나는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앉아서 묵묵히 듣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대화방식이 1:1, 1:N 일 때보다 N:N 인 경우가 상당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요. 한 사람이 말하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는 법인장님의 공식석상을 제외하곤 드문 편입니다. 이방인인 저는 혼란과 혼돈 그 자체인데 스페인 동료에겐 익숙한 일상이에요.
회의 도중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크리스티나가 뚜벅뚜벅 들어와 앞뒤 없이 본인의 요구사항을 퍼붓듯 읊습니다. 듣던 저는 '아니, 뭐 저런 억지가 다 있어?' 하며 데이터를 보이며 반박하려고 손을 올리려는 순간, 인자하신 기예르모 차장님이 바로 팔을 제 가슴으로 뻗으며 미간에 내 천川 자를 그리십니다. 놀래서 휘둥그레진 저를 보며 조용히 한마디 하십니다.
스페인에선 여자가 말할 때, 남자는 일단 가만있는 거야
헉! 이 정도라니. 그러고 보니 정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들어줍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팁을 알려주셨어요.
여자와는 따지고 싶어도 나중에 해 확실한 게 아닌 이상 일단은 알겠다고 해
일단 여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확실하게 no 라고 답할 건이 아닌 주제에 대해서는 yes 를 먼저 하라. 이후로도 이어지는 크고 작은 미팅에서 기예르모의 팁은 다른 동료에게서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스페인 미팅의 정석입니다.
참고로, 스페인에선 언변이 좋은 사람을 pico de oro 삐꼬 데 오로라고 부릅니다. 오래된 표현인데요, 직역하자면 <황금 부리>란 뜻이에요. 영어로는 silver-tongued <은으로 된 혀>라고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영국에선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라고 여긴 반면, 스페인에선 '침묵이라니?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대신 잘 포장해서 전달하는 게 중요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민족성의 차이가 언어와 어휘에서도 이런 다름을 보이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고객은 고객일 뿐 왕도 아니고 항상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선 작은 상점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고객과 손님과의 관계를 상하 관계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객은 왕, 손님을 가족처럼, 고객님은 언제나 옳습니다, 이런 문구를 심심찮게 보지요. 고객 입장에선 무척이나 편하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에선 어렵고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영어사전에 까지 등재된 Gapjil 갑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스페인에선 고객이건 직원이건 똑같이 사람입니다. 고객은 필요한 게 있어 상점에 오고, 상점의 직원은 돈을 받으니, 그 대가로 필요를 채워줄 뿐입니다. 필요에 의해 돈과 유무형의 상품이 오가는 것이니, 누가 위다 아래다 하는 개념이 없지요. 그래서 스페인에선 고객은 (당연히) 왕이 아닙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 억지로 가족이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객이나 직원이나 똑같은 사람이니 실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겁니다.
<고객은 항상 옳다 The customer is always right>는 문구는 언제 처음 사용되었을까요? 1909년 영국 런던에 셀프리지 백화점을 연 해리 고든 셀프리지 사장이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전 직원에게 알린 슬로건입니다. 그런데 스페인 경제 언론에선 대놓고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제목으로 칼럼글을 씁니다. 얼마나 다른 성향을 가졌는지 짐작이 되지요.
그래서 식당, 은행, 주유소, 백화점 매장 어디건 간에 스페인에선 언제나 1:1 동등한 관계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것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해가 안 되면 혼자 분을 내고 삭일 것이 아니라, 왜냐고 이유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으면 소모적 논쟁으로 맞네 틀리네 할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는 방법으로 말이 오가야 합니다. 가끔은 스페인과 한국의 기업 문화가 절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볼 때가 있습니다.
칼럼 <고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출처: economia3.com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창피해도 그때 바로 인정하고 개선 방향을 잡고 실천하면 오히려 멋진 재도약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스페인의 모든 비즈니스 세계를 대표하는 게 아닙니다. 대표할 수도 없습니다. 혈육의 가족마저도 제각각 성격과 기질이 다른 데, 어떻게 백이면 백, 전부 다른 환경에 있는 직업의 세계를 일단락 지어서 얘기할 수 있겠어요.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기를 바란다면, 내가 속한 회사나 사회에 요구함과 동시에 나 자신도 점검해 봐야겠지요. 다음 글에는 이런 스페인 국민의 한 해를 돌아보는 이야기, 명절의 문화로 찾아가겠습니다.
-끝-
덧글. 각 나라의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재미로만 봐주세요.
뜨거운 태양의 나라 스페인은 대체 무엇으로 해결을...
네, 그렇습니다. 시에스타가 해결책이었어요.
제가 스페인에 살아서 그런가, 그리 동의 되진 않네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출처 twitter @jeromevadon
이해를 돕기 위해 위로부터 10개의 나라 알려드려요.
독일, 미국, 러시아,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이태리, 스위스, 프랑스, 아이슬란드.
마지막 아이슬란드의 말이 무슨 말인가 싶지요?
Þetta reddast (세타 레더스트)는 "결국엔 모든 게 잘 될 거야!"라는 뜻입니다. 워낙 어려운 환경에서 커온 사람들이라 어떤 일이든 Þetta reddast로 서로 격려하며 살아온 지혜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너무 낙천적이라 그런지 문제는 그대로 두고 은근슬쩍 피하네요?
저는 프랑스가 제일 재밌습니다.
익히 경험했듯 까다롭기로는 월드탑.
문제 해결하랬더니 문제"들" 만들어내는 그 능력이란.
아,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농담입니다.
프랑스 거주 중이거나 프랑스와 관련된 분들 화내지 마세요.
저 외고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프랑스어만 7년 공부하고 지금도 잊지 않으려 노력 중인 프랑코필 Francophile 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