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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ug 04. 2021

쓰는 게 멈칫 멈칫할 때

수다를 좋아하고, 말하는 걸 업으로 삼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당연 말하지 말라는, 또는 말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는 상황일 것이다. 버스, 기차,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 중인 때만큼 온전한 내 시간과 내 장소다. 비록 메마른 엉덩이 하나만의 공간이 다일지라도 최소 두 시간은 보장이 되는 이동시간은 변함없는 설렘을 가져다준다.


일을 시작하러 이동하는 거면 긴장과 흥분으로 넘쳐나서, 반대로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면 밀려오는 뿌듯함과 개운함에 기쁨이 과하게 넘쳐서. 몸은 가만히 있어도 마음은 쉴 틈이 없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깃거리로 입이 간질거린다. 축복받은 시간, 그냥 멍 때리며 보낼 수 없지, 암은.


헌데 주위를 둘러보면 별 말이 없다. 자거나, 다운로드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다 못해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식으로 조용하다. 하아, 이렇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메신저로 안부를 전하는 것이 전부가 된다. 하지만, 한 두 명 쓰고 나면 손가락이 떨리고 아파서 더는 못한다. '아니, 스페인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했다고 쳇' 하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심통을 부리기도 한다.


책을 펼쳐 든다. 그렇게나 읽고 싶었던 인문학 책이지만, 미안하게도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밤에 호텔 침대에서 읽으면 그렇게나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착착 안기더만, 기차 좌석에서는 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타이밍 때문이다. 지금은 활자에 박힌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며 독해하는 것보다, 내 가슴속 가득한 이야기를 눈치 안 보고 웃고 떠들면서 속을 후련하게 하고픈 시간인지라 당최 눈에 안 들어온다.


슈퍼맨이라도 되어 대기권을 뚫고 나갈 기세였던 에너지가 주위 환경으로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나면, 기세 등등했던 범의 의지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고 만다. 그러면 휴대폰 또는 탭을 꺼내 들고 메모식으로 글을 써 본다. 브런치에 쓰기 이전 페이스북에 끄적거리던 글은 그렇게 탄생했다.


말캉거리는 감성의 글은 무언가 독자에게 나름 영양가 있는 정보도 전해 주고픈 마음에 장르의 구별이 뒤섞이고 만다. 처음의 의도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당최 무슨 글을 전하려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노자의 문장을 만났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 알지 못한다
노자 56장


뒤통수를 제대로 꽝! 내리쳐 맞은 느낌. 잔망스럽게 까불대던 타이핑에서 손가락의 힘이 떨어진다. '안다고 하는 게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자기 검열이 뒤따른다. 무수한 복사와 붙이기 속에 나뒹굴어진 인터넷 정보의 한계는 일찌감치 파악했지만, 그렇다면 책은 과연 그런 것에서 온전하다 할 수 있을까. 책 역시 누군가의 지식을 다시 이리 엮고 저리 짜보며 자신의 언어로 소화해 재창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렇다면 지식이 아닌 감성과 깨우침의 영역은 남다를까. 관찰 중에 문득 아! 하는 탄식으로 깨달은 거라며, 남들이 모르는 비책이라도 밝힌 것 마냥 재발견을 했다며 혼자 신나 하던 순간들. 실은 이미 다른 사람은 일찌감치 깨우쳤다. 다행히 그 지식과 지혜의 물이 파고 나면 바닥을 드러내는 웅덩이가 아니라 샘물인 덕에 현장을 오가는 이들의 목을 축여준 것일 뿐. 내가 한 모금 마신 물 또한 뒤이어 오는 사람을 위해 깨끗하게 물려줘야 한다.


감각으로 깨우친 깊이는 찰랑거리기 그지없는데, 그것을 대단한 재발견이라며 포장할 필요가 있을까. 느낌을 적는 것이라면, 다음 드는 생각은, 그래서 어쩔 건데?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데? 자신에게 디밀어 보는 차가운 송곳 질문들. 결론 없이 계속 끼어드는 질문은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발가락 사이에 끼이는 백사장의 모래가 되어 쌓여간다.


다른 이에게 알리기 전에 먼저는 나 자신을 위한 글이라 하지만, 어찌 되었건 누군가에게 보이는 글이 되고 마는데.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생각을 대신하겠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글쓰기가 멈칫해졌다. 이윽고 찾아오는 건 끝없는 회의감.


하얀 화면을 채우는 활자가 훗날 책으로 출간된다 할 때 펄프의 낭비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글을 써 나가야 할까. 그보다 모든 질문에 앞서 왜 글을 쓰려하는 것일까. 감정 해소, 정보 전달, 마음 치유, 생각 정리...


애초 바닷가에 가지 않는다면 까끌거리는 모래와 씨름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래 없이 발끝을 간질이는 바닷물과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파도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아, 자갈과 바위 해변은 예외로 해야겠다. 더 깊이 들어가 파도를 타고 수영을 즐기는 자에게 모래는 들어가고 나가는 순간에만 거쳐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글쓰기라는 바닷가에서 입욕도 안 한채 여태 밀물과 썰물이 드러나는 모래사장에서만 노닐던 수준을 넘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글쓰기 수준도 올리고, 한편의 글도 보다 업그레이드 하고 싶다. 괜한 어깨뽕은 빼고, 담백하되 뻔하디 뻔한 이야기의 차원을 넘고 싶다. 아는 자와 말하는 자의 황금비율을 이룰 수는 없을까. 입욕 전까지 뒷짐지고 관망만 하던 거북목 아재에서 하얀 파도 위로 서핑을 즐기는 탄탄한 중년으로 탈바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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