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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ug 16. 2021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쓰는 글

하루 이틀 안 쓰다 보니 어느새 글에서 손을 놓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


언제나 그렇다. 그 누구의 부추김도 아닌 혼자서,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것에 이끌린다. 글감이 퍼뜩 떠올랐을 때 놓치면 안 되지 하는 생각으로 써 내려간다. 그나마 초반에는 며칠 묵히며 생각의 발효를 기다렸지만, 일상에 치이면서부터는 지금 아니면 없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글쓰기에 몇 시간이고 쏟아붓듯 쓰고서 발행 버튼을 눌러 글을 올리고 (혼자) 좋아한다. 이후에 알림으로 오는 '좋아요'에 감사한다. 댓글이라도 달리면, 자주 쓰는 말이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온다.  


대부분의 댓글은 모르는 분들이 아닌 아는 분들이거나 브런치 작가님으로 서로 구독하는 사이가 많다. 문우님으로 칭하는 이 분들은 따끔한 언중유골의 비판보다는 거의 언제나 따뜻한 공감을 비롯해 칭찬과 격려 가득한 글을 남긴다. 한두 줄이 되었건, 몇 개의 문단이 되었건 활자들은 하나 빠짐없이 오롯이 온기가 서린다. 정에 굶주린 불혹이 휘갈긴 몸글에 이역만리를 마다하고 마중 나와 반긴다. 40도를 오가는 이 여름, 두레박으로 막 퍼올린 우물물 마냥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문우님과 이웃의 댓글이 어쭙잖은 본문보다 나은 통찰을 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덕에 그저 그런 일상의 에세이도 무언가를 간직하는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은 다시 생각을 넓혀주는 마당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애틋한 마음이 오고 간 사서함이자 타임캡슐로 자리 잡는다. 


브런치에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처럼 상대방의 댓글에도 좋아요를 누르는 기능이 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글 하나 쓰는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로선 답글도 고민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짧게 쓰자니 내 속이 편치 않고, 길게 쓴다 해도 알맹이 없는 말만 만연체로 늘어놓은 것 같아서다. 실은, 정성 어린 댓글에 못 미치는 정성으로 미숙한 답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달리 말하면, 내공이 부족하다, 변명의 여지없이. 


그래서 일단은 글을 읽어주는 분들이 라이킷(좋아요) 한번 눌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사한 마음은 가득하다. "잘 읽었어요."라는 말씀 한 마디만으로도 당신의 진심을 충분히 안다는 걸 전달하고 싶다. 미처 뜸 들이지 못한 엉성한 답글로 그대의 정성 어린 댓글을 가리느니, 먼저 '댓글 정말 감사히 읽었어요, 진심으로 고마워요' 이 말을 공감 스티커를 통해서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것도 하나 말고 열개, 스무 개의 느낌으로.




하지만 일상에 쫓기다 보면 순정만화에나 나올법한 바람과 낭만은 사라진다. 일상에 쫓긴다는 게 맞는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누가 나보고 이렇게 살라고 한 것도 아닌데. 다 큰 어른이 본인이 짜 놓은 틀 속에서 본인이 빌빌대다니, 이게 무슨 빙충맞은 소리인가 싶다. 


하루 이틀 미루다 밀리기 시작한 글쓰기의 못난 변명이다 ; 스페인은 지금 너무나 덥다. 지난주 30도 내외로 서늘할 때, 이게 무슨 기상이변이냐며 배부른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그럴 시간에 글감 하나라도 더 잡아챘어야 했다. 40도 내외를 오가는 이번 주 내내 하루도 시에스타를 벗어난 날이 없었다. 냉수 샤워를 네댓 번씩 해도 정신이 혼미했다. '마음은 원이로다 육신이 약하도다'는 말은 가식이 될 처지였다.


거기에 초등 4학년 둘째의 스페인어를 제외한 전과목 과외를 끝내가며 시작한 중1 첫째의 수학 과외는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지금 쓰면서도 비유 대상을 못 찾겠다.) 매번 할 때마다 그 아이에게 묻는 질문이자 나에게 던지는 물음표가 있다 : '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그래, 그럴 수 있지' 하며 봐 줘야 하는 건가?' 


첫째도 둘째도 선행학습은 꿈도 안 꾼다. 그저 복습일 뿐인데, 한숨이 가시질 않는다. 본인도 게을러서 아이들의 스페인어 이해 수준을 심도 있게 가늠치 못했던 무심한 학부모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 제 자식이 가르치는 게 제일 어려운 일 중 하나라는 말은 익히 이전에 피아노 레슨을 하며 느낀 바였다. 그렇지만, 취미가 아닌 공부의 영역에서, 숙제가 아닌 과외로 넘어가자 더는 나 자신을 감당 못하고 있는 대로 분을 내는 못난 아비가 되고 말았다. 


큰소리로 일갈하는 아빠 다음으로는 언제나 마음을 보듬는 엄마가 있다. 아내는 차분하게 아이의 마음을 정리해 주고, 이어 나의 마음도 헤아린다. 그러면서도 두 아들에게 아빠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게 한다. 그렇게 추켜주는 대상과 본인 또한 서로 성정과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지만, 그런 거야 이제는 무시해도 될 수준이다. 유, 초, 중, 아이 셋을 친정 찬스 한 번 없이 오롯이 혼자 키워낸, 능력 출중하고 훌륭한 당신이다. 하루 세끼 아니 다섯 끼 밥과 간식상을 차려내며 가사에 육아만 하기에는 아까운 손재주와 타고난 눈썰미가 있는데, 코로나 시국 속에 얼마나 속이 탈까. 


여담으로 중고등학생 시절, 부모님의 교육관은 '자유방임' 그 자체셨다. 문제집 구입에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다만, 시험 결과에는 언제나 한결같으셨다 : 못 봤으면 다음에 잘해라, 잘 봤으면 잘했다. 무슨 후니훈의 비트박스 공식, 북치기 박치기 광고도 아닌데, 정말 내가 기억하는 건 달랑 그 두 개뿐이었다.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나는 <내 자식 보기를 남 자식 보듯> 하는 것과 <귀찮은 게 바로 나의 일이다>라는 것 두 가지로 주부아빠가 되어 아이의 과외를 맡고 있다.




오전, 오후 두 오빠의 과외가 끝나면 저녁 식사 전까지 쉼이 있다. 그렇다고 글쓰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다. 덥고, 시끄럽다. 도대체가 정신집중이 안 된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찬물 샤워와 여기저기 인터넷을 기웃거리며 읽고 보고 듣는 일이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 보면, 처음에는 영감을 받는 것처럼, 아 이걸로 글을 써야지 하다가도, 결국 당장에 쓰지 못하는 환경 탓에 무너진다. 그들의 영혼을 갈아 넣은 노력과 도전의 업적은 무시한 채, 그들이 누리는 성공의 화려함에만 열을 올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만 아니면, 저것만 아니면 하면서 주위 탓을 하든지, 반대로, 이것만 됐어도, 저것만 있었어도 하는 식으로 역시나 주위를 향한 체념을 남발한다. 얼마 안 있으면 변함없이 다음의 생각이 찾아온다 : 난(넌) 대체 뭐하는 놈이야. 현타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상사가 남긴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내게 종잇장을 날리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뻑하면 내뱉었던 그 말.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그러면 자괴감에 빠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우적대고 마는 마의 늪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다.


그러게요, 저 대체 뭐 하는 걸까요? 글쓰기에 적합한 환경 찾으려고 하릴없이 시간 보내다가 마침내 온 식구가 잠든 시간, 결국 나 자신도 체력적으로 고갈되어 이것도 놓치고, 저것도 못하고 있어요. 인풋 없이 아웃풋만을 내려고 하니 부실하지요. 밑천도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요. 다독, 다작, 다상량 중에 앞에 둘을 못하든 안 하든, 결과적으로 한 게 없으니, 남는 것도 없어요. 그러니 다상량이란 허울은 결국 몽상으로 끝나고요. 아, 그만, 그마안! 더는 안 되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 환경 탓에 변명만 늘어놓으며 자신을 갉아먹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 무능하게 주저앉아 애꿎은 가족에게 화살 돌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 글쓰기 하나 조차 자신의 굳은 의지 없이 휘둘리는 사람.


작심삼일의 반복이요, 주사 부리듯 한 얘기 또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시 쓰면서 속을 드러낸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바라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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