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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ug 17. 2021

큰 나무에는 새가 깃든다

벗과 문우를 향한 갈망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중국어로 쓰면 마덕리马德里로 부르는 그곳, 거기서도 30킬로 떨어진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고향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는 곳곳에 나무가 많다. 물도 없는 건조한 이 땅에 어떻게 물을 대서 나무를 키우고 관리하는 걸까. 새벽, 오전, 오후에 나뉘어 때가 되면 흙더미에서 불쑥 스프링클러가 올라오거나, 나무 기둥 모습 그대로 고리 모양의 호스에서 물이 나와 충분히 적셔준다. 


어쩌다 한 번 비가 오긴 하지만, 문자 그대로 오는 시늉만 내는 정도다. 한국에서 맞이하는 여름은 홍수와 장마로 걱정이었는데, 여기서는 타들어가는 열기 때문에 비가 그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간사한지 2주 전엔 30도 밖에 안 되는 기온에 시원하면서도 염려가 된다고 설레발을 치다가, 지난주 40도가 넘자 이러다 죽겠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러다 오늘 최고기온 36도 밖에 안 되자, 이번엔 또 왜 이리 시원하냐며 들뜬 하루를 보냈다. 사실, 절기상으론 입추가 지났으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걸로 봐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코로나로 얼어붙은 경기와 일이 없어 가뜩이나 어려운데 여기에 시간대별 가격 차등제를 적용한 전기세 정책으로 우리 집 살림이 달라지는 진풍경을 펼치기도 했다. (현재도 진행 중이다) 아침에 해뜨기 시작해 밤 9시 반 경 질 때까지, 버너를 틀어놓은 듯한 열기를 막고자, 방마다 창 밖 차단개인 페르시아나 persiana를 내리고, 베란다에는 똘도 toldo(천막)를 말아 내려 재끼며 아파트를 움막으로 변형, 어두컴컴한 데서 필요할 때만 전깃불을 켰다가 바로 끄고 산다. 그마저도 햇빛이 얼마나 센지 틈 사이의 빛만으로도 집안은 환해진다.


음식도 불을 웬만해선 피해서 조리하려고 한다. 실제로 아는 분 중엔 삼시세끼 샐러드로만 해결한다며, 일체의 불을 피우지 않고 모든 끼니를 해결하는 가정도 있다. 하지만 찐 한국인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집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부엌의 인덕션에 압력솥, 냄비, 프라잉팬을 올려놓고 밥, 반찬, 국은 물론이거니와 사이사이 간식까지 본인 손으로 다 만들어내는 맥가이버 아내는 항상 비지땀으로 가득하다. 어쩌다 남편이 라면 끓이듯 파스타를 하곤 하지만, 부엌은 어찌 되었건 들어오자마자 뛰쳐나가고 싶은 공간이 된다. 


도대체 네가 사는 방식이 21세기 글로벌 시대인 거 맞니? 이런 따끔한 질문에 미천한 한량 아비로서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민망하고 미안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간 다용도실에 넣고 잊고 있었던 헤어밴드가 달린 헤드라이트와 손으로 돌려 불을 밝히는 휴대용 랜턴을 꺼내 써서 인디애나 존스라도 된 거 마냥 신이 났다. 현대판 흥부네 집인 셈이다. 불평 없이 같이 여름을 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고맙기만 하다.


그래서 과외도 전에는 하루 종일 했지만, 이젠 가급적 한낮은 피한다. 도무지 효율이 오르지 않는다. 하긴 그러니 학교에서도 방학放學이라며 학업을 잠시 놓아두는 기간을 둔 게 아니겠는가. 아무리 다그쳐도 자녀가 아빠가처럼 다량의 카페인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는 게 아닌 이상 각성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엄마는 그야말로 세 자녀 + 남편의 밥과 간식 준비, 여기에 가사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라기에 아이들 챙기고 나가는 건 당연히 아빠의 몫이다. 오빠들의 과외 사이사이에 막내는 책을 읽어 달라며 들이밀고 (한글과 알파벳 습득 끝나기만 기다리길 벌써 3년째!) 지난주 35도 안팎으로 나름 cool-down 된 저녁 시간이면 놀이터 가는 걸 당연한 일과로 여기는 막내 딸랑구 덕분에 아빠 역시 눈에 보이는 소득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다.


막내딸을 데리고 나가는 게 집안에서의 일 (막내 씻기기 - 그래도 요즘엔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나서서 감사하다,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시작하고 정리하기 - 밤 10시부터 전기세가 인하되기 때문에 늘 그때 시작해야 한다)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거치는 루틴이기 때문에, 이왕에 하는 거 즐겁게 하려고 이런저런 이야기 소재를 찾는다.




막내가 나갈 때면 종종 둘째 녀석이 같이 갈 때가 있다. 둘이서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새들의 귀가다. 저녁때 노을이 질 때가 되면 아파트 옥상 곳곳에 있던 제비와 비둘기, 초록 앵무새가 떼 지어 날아든다. 시계 없이도 해의 뜨고 짐을 따라 녀석들은 잘도 찾아온다. 저마다의 안식처를 놓치지 않고, 일단 날아온 새가 쫓겨 나가는 일도 없다. 그 모든 새를 안고 있는 것은 유난히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다. 


어림 잡아도 한 번에 적게는 열 마리에서 많게는 삼십 마리 남짓 날아오고, 그렇게 무리 지어 오는 새가 수십 집단이다. 평균 스무 마리로 본다 해도 스무 집단이 오면 사백 마리가 오는 건데, 더 될 것이다. 어디에선가 한번 오기 시작하면, 저마다 일정 주파수라도 맞춘 듯 간격을 두고 계속 날아들기 때문에, 알칼라의 엘 초리요 동네에 위치한 Hotel El Pino (소나무 호텔, 엘 피노)는 오늘도 만원을 빈방, 아니 빈 가지 하나 없이 성업 중일 것이다. 


분명 빽빽하게 들어찼을 것 같은데도, 아름드리 소나무는 계속해서 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저러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거 아닌가 싶은데도 연륜 모를 통나무 숙소는 끄떡없다. 인간이 볼 때는 따가울 것만 같은 침엽수의 가지겠지만, 종일 햇볕을 피해 다녔을 새에게는 까슬거리면서도 시원해서 여름 나기에 더없이 좋을 해먹일런지도 모른다.


모여든 새들마다 수다 왕인 건지, 다들 재잘대고 짹짹거리느라 바쁘다. 누군가 저들의 말을 통역한다면 인간 세상사가 다 나올 것만 같다. 장난 삼아 앵무새에 빙의해서 애들 보고 너희는 오늘 뭐하면서 보냈느냐고 할 때가 있다. 아이들에게 지나간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 지금 당장 뭘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옆으로 새는 얘기지만, 할리웃 영화에선 오랜만에 찾아간 친구의 안부를 물어보면 뭐라 할까. How are you? 하면 I'm fine thank you, and you? 그럴까? 틀린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교과서식 영어다. 영화에선 대개 피식 웃으면서 The same old thing, 늘 똑같지 뭐, 하면서 어깨 한번 으쓱한다. 앞으로 안부 장면이 나오면 유심히 보시길, 그런 데서 재미를 찾게 될 날이 온다. 여하간 저들은 늘 똑같다는 시동을 걸고 나서부터 하려는 말이 등장한다.


새들의 수다를 멍하니 듣고 있노라면 예전에 손님들과 40인승 버스의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처럼 한여름일 때는 종일 에어컨을 틀며 누비고, 밤이면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 후 카드 열쇠를 건네며 고단하고도 즐거운 일과를 마무리했다. '편히 주무세요' 인사드리면 답례로 '가이드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며 미소와 함께 인사가 오간다. 다시 저마다 삼삼오오 흩어져 객실에서 또는 호텔 로비에 모여 마저 이야기 꽃을 피우는 걸 보면 사람은 절대적으로 사회적 존재임을 실감한다.


내 얘기를 하는 게 재미있는 만큼, 다양한 삶을 살아온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상당한 즐거움이고 유익이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고, 감탄과 탄식의 추임새가 절로 나오며, 들으면서 궁금한 점은 물어보곤 했다. 그러다 보면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호텔 바에선 자기들은 퇴근해야 한다고 했고, 객실에선 들여다본 손목시계의 시침에 화들짝 놀랐다. 손님-가이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격의 없지만 진심이 오가는 얘기 덕에 하루의 피로는 다 풀렸고, 개운한 기분 속에 샤워하고 자면 다음 날 또 웃으며 시작할 힘이 났다.




나무는 소리 없이 자라서 어느새 아름드리가 되어 수많은 새를 벗으로 삼는다. 아침이면 출근했다 저녁이면 귀가하고, 가을이면 떠나지만 봄이 되면 돌아온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푸른 가지와 잎새 속에 저들을 말없이 반겨준다. 다프네는 아니지만 나도 나무였으면 하고 바라본다. 인스타그램 속 고국의 모습은 나날이 발전하고 진화하며 첨단을 달리고, 사람들 또한 앞서 간다. 반대편에선 코로나로 오도 가도 못한 채, 불안과 답답함 속에 현 시국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과거의 일상만 곱씹는다. 저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차고 물만 자주 벌컥 인다.


움직이지 못할 바에야 저 나무처럼 품이라도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동네에선 큰 바위 얼굴 대신 저 소나무를 벗으로 삼아야겠다. 어쩌면 저 소나무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과 같은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딸의 손을 붙잡고 나올 때마다 보는 나무. 그 나무를 보고 움츠러들지 말고 나도 같이 어깨도 펴고 가슴도 으쓱 내밀어 봐야겠다. 옷은 스몰 사이즈에 바지는 아내 걸 입어도 맞을 정도로 왜소하지만, 가슴에 품어보는 꿈과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만큼은 원 없이 크기를. 벗님이 깃들고 문우님의 사귐이 이어지기를.



동네 교차로 소나무


제목 사진 - 세고비아 산 마르꼬스 공원 Pradera de San Marcos en Sego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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