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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ug 06. 2021

아들과 아빠의 스페인어 받아쓰기 시합

초등 4학년과 40대 아빠의 대결, 승자는?

스페인의 여름방학은 제법 깁니다. 6월 셋째 주에서 넷째 주 사이에 시작한 방학은 보통 9월 첫째 주까지 갑니다. 두 달은 기본이고 보름에서 3주 정도 더 쉬지요. 무려 최소 75일간의 방학이라니. 그렇게나 놀기 좋다는 대학생 때도 이렇게 쉬어본 적이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 이것도 이미 옛날 얘기군요. 지금은 신입생도 바로 공부, 스터디, 발표 준비를 대리급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입학도 졸업도 다 날로 먹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공부 얘기할 때면 마음 한편이 찜찜합니다.


스페인은 일단 한국처럼 아파트 단지 별로 보습학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마드리드 시내에 살던 때는 딱 두 군데를 보긴 했지만, 크기가 방 대여섯 개 정도밖에 안 되는, 매우 영세한 크기라 한국의 그것에 비할 바는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 등하교 길에 있어 오갈 때마다 보곤 했는데, 저 학생 수로 운영이 될까 할 정도로 극소수의 학생들만 있었어요. 정말 학습부진아들만 어쩔 수 없이 유급을 면하기 위해 다니는가 보다 싶을 정도였지요. 여기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유급이 적용되거든요. 설렁설렁하는 듯 보이는데도, 유급제도가 있다는 말이 문화충격이었습니다.


수도에서 불과 30km 떨어진 곳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 동네는 명색은 학문의 도시인데, 여기서의 공부란 모두 자습과 독학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듯 보입니다. 있어봐야 영어학원과 기타 교습이 전부예요. 아, 하나 더, 체육관 전단지는 자주 보입니다. 그 외 축구, 럭비, 빠델 (테니스와 비슷한 운동) 클럽 등... 엉덩이 힘이 좋은 저와는 모두 거리가 먼 것들이지요.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스페인인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자니 델타 변이 코로나 시국에 불안합니다. 현재 일일 확진자가 2, 3만 명을 기본값으로 달고 있어서요...라고 핑계를 대고 싶지만, 실은 쩐이 부족합니다. 네, 모든 건 돈으로 귀결됩니다. 이미 1년 반 가까이 쉬고 있어서요. 




6월 마지막 주부터 7월 첫 주까지 2주간은 가족 여행으로 스페인 남부와 북부를 다녀왔어요. 1년 반 쉰다면서 현금 겁나 꼬불쳐 놨나 보네? 할 수 있는데, 아닙니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리 늦어도 9월부터는 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거기에 6월 문 대통령님의 국빈 방문까지 있었으니, 물꼬가 트일 수 있겠다고 다들 여겼어요. 


스페인의 가이드는 한번 밖으로 일 나가기 시작하면 스페인 전체는 물론 포르투갈과 모로코까지 다녀가기 때문에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정말 적거든요. 집에 오더라도 잠만 자고, 캐리어와 옷만 바꿔서 다시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일 재개하면 이런 시간은 다시는 못 보낼 테니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오히려 마음속엔 나름의 각오까지 하며 다녀왔어요. 그런데 이렇게나 판을 뒤집어 놓는 변이 세력이 나타날 줄이야. 이미 화이자 1, 2차까지 모두 맞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데.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렇다고 무력하게만 보낼 수는 없잖아요. 일단 여행은 다녀왔고, 다시 2주간은 방학 기분 내라며 풀어줬어요. 저 역시 그냥 불규칙한 스페인의 생활 리듬 속에 몸을 맡겼습니다.


7월 4주 차부터 주부 아빠는 과외 교사가 되어 초등학교 4학년 둘째 녀석의 전과목 학습 도우미가 되었습니다. (주부아빠에서 과외교사로 +1 능력치 추가함) 전과목이라 봐야 책으로 공부하는 건 전부 5과목 밖에 안 되어요. 스페인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선행 학습 절대 아니고요. 배웠던 거 복습하는 겁니다. 스페인 역시 코로나로 2020년 봄 학기, 아이들 공부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요. 특히 부모가 모두 집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하고 아이는 밖을 나가지 못한 채 온라인에만 의존하다 보니 스페인어가 제대로 늘기가 어려웠습니다. 


중1 (당시 초6)인 큰 아들은 고맙게도 공부습관이 잘 자리를 잡았지만, 둘째에겐 무리였어요. 그런 아이에겐 복습만 잘해줘도 고맙겠단 생각이 들었지요. 한편으론, 슬로바키아-스페인을 나오기 전 서초에서 영어강사 경력으로 당시 아이들의 선행학습 폐해에 대해 절감하던 터라, 절대 선행을 시키지 않겠다 다짐했던 점도 있고요. 


참고로, 학년별 과목은 잘 마쳤고, 선행할 게 아니라면, 초등학생에게 한 달을 넘게 쓰고도 아직도 한 달 남짓 펑펑 남는 방학 시간, 뭘 시킬 거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독서와 글쓰기>입니다.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 세 언어로 하나의 글을 읽고 쓴다면, 시간은 모자라죠. 만화일지라도 (사실 언어 공부에는 영화보다 만화가 더 좋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인공들의 대사가 쉬지 않고 나오거든요) 세 개의 언어로 돌려서 보고, 부모가 같이 자리를 한다면, 굉장히 좋은 언어 습득 훈련이 됩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과목 중 스페인어와 수학 책은 스페인어로 되어 있고요, 나머지 영어, 과학, 사회는 영어입니다. 중학교 가면 과목별 언어 배치가 달라지고, 여기에 독일어가 제2외국어 과목으로 추가됩니다. 제가 전공한 프랑스어를 학교에서 가르치면 좋겠는데, 실리적으로 나가네요. 실제로 해마다 14,000명 가량의 스페인 대학생이 취업하러 독일로 가고 있습니다.


각 학년은 우리나라와 달리 3학기제로 되어 있어, 9월부터 크리스마스 방학까지 1학기, 다시 1월 6일 주현절 이후 2학기를 시작하고, 부활절 방학 때 일주일 가량 쉽니다. 부활절이 지나면 3학기를 하고 학년을 마치며 진학을 할지 유급을 받아 한 학년을 다시 공부할지가 결정됩니다. 초등학생한테 유급이라니, 말만 그런 거겠지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유급 적용이 됩니다. 여기에는 선생님의 권한이 절대적이고요. 대신 부모와 해당 학생 간의 충분한 상담 시간을 가집니다.


사회와 과학책은 각각 6단원입니다. 한 학기에 2과씩 나간다는 얘기가 되겠죠. 영어는 9단원, 수학과 스페인어는 12단원까지 있습니다. 학기당 4단원씩이에요. 그래서 책들도 맞춰서 쪼개져 있어서 상당히 얇은 편입니다. 아예 책 표지에 <가벼운 책>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합니다. 아이들 성장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예요. 


심지어 그런 책이 들은 책가방인데도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닙니다. 열에 아홉이 그렇게 다녀요.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 과학 교과서에는 <건강한 생활습관>에 어깨 하나로만 메는 가방은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양쪽 어깨를 쓰거나, 더 좋은 건 아예 바퀴 달린 가방으로 끌고 다니는 거라고 소개가 되어 있을 정도지요. 그러고도 사물함이 따로 또 주어져요. 




3주 차인 지금 영어는 다행히 복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사회와 과학도 마지막 단원만 남아 있는 상태예요. 수학은 2학기를 거의 끝내고 3학기 과정만 남았습니다. 아이가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무리 없이 잘 마칠 거 같습니다. 


문제는 스페인어인데, 이건 사실상 저로서도 완전한 공부입니다. 어휘, 어법, 독해, 작문. 영어처럼 한 시간에 한 단원이 아니라, 겨우 두 페이지인데, 몇 번을 읽고 묻고 답하고 무슨 뜻인지 파악하고 그러다 사전 찾고 하다 보면 뻗습니다. 


단원당 독해 지문은 최소한 세 번은 읽어요. 혼자 읽으라 하면 재미없으니 같이 읽습니다. 그럼 아이는 그래도 본인이 수업시간에 배우기도 했고, 저보다 스페인 원어민에 가깝게 자연스럽게 발음하는 터라, 저의 부자연스러운 강세와 억양을 몇 번이고 고쳐줍니다. 실은 단어의 강세는 그냥 들으면 별 차이도 없어요. 미세한 차이인데도 족집게 같이 탁 알아차리는 게 신기해요. 


쓰고 보니 녀석에게 고맙네요. 저는 몇 번이고가 아니라 두세 번만 다시 반복해도 버럭 화가 나기 마련인데요. 아이고... 미안해라. 내일은 더 쓰담쓰담을 많이 해 줘야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둘째도 스페인어를 어려워하는 까닭에 휴대폰 또는 탭을 항상 켜놓고 있어요. 종이 사전도 종종 참고하고요. 


단 두 페이지를 위해 아빠는 예습을 합니다. 아들과 지문을 같이 읽고요. 아들보다 아빠가 더 많이 물어봅니다. 덕분에 스페인어 원 없이 해 보는 기회를 가져요. 아들도 저도 처음엔 어버버 하며 뜻 찾아 헤맨 문장들이 (스페인어는 관계대명사 때문에 긴 문장이 정말 많아요), 두 번, 세 번, 거듭 읽을 때마다 하나씩 확실하게 알아가는 기쁨에 얼굴에서 자신감이 묻어납니다.


讀書百遍 義自見 독서백편 의자현
책을 백번 읽으면 그 뜻은 저절로 알게 된다


외국어 원서와 고전을 읽을 때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길이 없을 때마다 위 말을 되뇌곤 했어요. 영어 강사 시절,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라며 천연덕스럽게 물을 때마다 위 말을 강조하곤 했지요. 단어나 문장의 뜻은 혼자서 백방으로 알아보고 간절해졌을 때 선생님에게 확인받아야 그 깨우침이 확실하고 오래간다는 걸 자주 경험했답니다.




그렇게 둘째와 공부하다가 받아쓰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아예 책에서 받아쓰기로 따로 나와 있기도 해요. 철자, 강세, 문장부호 등을 종합해서 보는 것이지요. 대번에 실망하는 기색을 띠길래 아빠도 같이 할 테니 서로 내기를 하자고 했어요. 승부욕 불타는 녀석, 싱글벙글합니다. 거기까진 좋아요. 


아니, 무슨 받아쓰기 하나에 자기가 이기면 닌텐도를 사달라 한답니까?! (자슥아, 우리 집엔 텔레비전 없는 거 모르나 니!) 본인이 말하고도 황당했던 게임기 요구는 현실성 있게 추파춥스 사탕으로 바꿨습니다. 저는 녀석에게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나서 공부 시작 시간을 당기는 걸로 걸었고요. 서로 deal? deal! 을 외치고, 저녁 6시에 시합을 하기로 했습니다. 


받아쓰기 본문을 읽는 건 큰아들에게 맡겼습니다. 엄마는 감독을 봐야 했지만, 엄마 역시 저녁 준비와 막내를 보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제1회 부자간 스페인어 받아쓰기 대회(?)를 한 시간 앞두고, 둘째는 부산을 떱니다. 문장을 나름 큰 소리로 여러 번 읽고, 써 보기도 하고, 책에다 헷갈리는 철자나 강세 표시가 있는 단어에는 눈에 띄게 표시를 해요. 아빠는 이미 한번 써 보고 여유 있게 기다립니다. 


약속된 시간 6시가 되어 받아쓰기 본문을 읽을 큰형이 들어오자 녀석은 살짝 긴장한 듯 보여요. 한편으론 자기가 열심히 읽었던 본문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녀석은 책상에서 아빠는 쭈그리고 각자 백지 한 장과 펜만 두고 준비를 마칩니다. 


큰 형은 자기도 해 봐서 안 다며 으스댑니다. 어랏, 그런데 너무 빨리 읽습니다. 

"야, 이건 지금 받아쓰기야!" 아빠가 호통을 칩니다. 녀석이 정신을 차립니다. 다시 적당한 속도로 읽습니다.


어, 분명 내가 쓰고 읽어본 글인데 왜 처음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냐.

이상하네, 이상해.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든 이겨야 30분이라도 빨리 시작해서, 30분 빨리 끝내고, 그만큼 자유시간도 쓸 수 있는데.

그런데 이 단어는 왜 암만 들어도 철자가 생각이 안 나냐. 이상하네 정말.

아빠는 인생사 본인 계획대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빠는 또 착각 속에 빠집니다.

재미 삼아 시작한 건데, 아빠의 머릿속엔 갑자기 츄파춥스 3개와 30분의 자유시간이 믹스됩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흐르는 시계 그림이 잠시 지나갑니다. 


둘째는 좀 전의 긴장은 어디 갔는지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여요. 중간중간 늦게 쓰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충분히 커버가 되는 듯 문장을 되뇌며 고개를 까닥거리기도 하고요.


받아쓰기 시험을 마치고, 서로 시험지를 바꾸고 채점을 합니다. 둘째는 아빠 건 못하겠다며 첫째 형에게 넘깁니다. 묘한 스릴감 속에 채점을 합니다. 틀린 게 적어야 이기는 것이고, 똑같은 결과면 양쪽 다 이긴 것으로 하며, 둘 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거든요. 둘째는 벌써 흥이 나 있어요.


두 개의 짧은 글에서 첫 번째 글은 둘째가 1개, 아빠가 2개를 틀렸어요. 녀석은 좋아라 해요.

두 번째 글에서 아빠는 엉뚱한 데서 실수를 하고 하나를 틀렸어요.

헌데, 둘째는 방심했는지 4개나 틀린 단어가 나오네요?! 


-3 vs. -5. 아빠의 승리입니다. 아싸, 룰루랄라, 내 자유시간. 아빠는 신이 났어요.

분하다는 둘째. 하지만 내기는 내기니까 결국 순순히 받아들여요. 

다행히(?) 받아쓰기는 매 단원마다 있어요. 오늘은 졌어도 내일 시합에선 이길 수 있지요.

기분전환 스위치가 식구들 중에 엄마와 더불어 제일 잘 변환되는 둘째는 오늘의 실패를 잘 넘겼네요.


녀석은 내일 30분 일찍 시작을 해요. 물론, 그 시작은 아빠와 같이 하고요. 아, 그런데 시간이 벌써? 내일은 아침부터 진하게 에스프레소 투 샷을 내려야 할 거 같습니다. 이런 글 쓸 줄 알았으면, 그냥 평소처럼 할 것을... 아빠는 결국 자승자박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모처럼만에 유쾌하게 같이 공부하니까 좋네요. 나중에 둘째 공부가 끝나면, 첫째의 영어와 수학을 마찬가지로 커버해줘야 한다는 게 함정이지만,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아빠와 전과목 과외라니. 선행도 아닌 복습으로. 심지어 그깟 받아쓰기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진지하면서도 흥분할 일이야 싶은가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지리 궁상맞아 보이는 모습도 분명 나름의 재미난 추억으로 자리 잡을 거라고, 그리 믿어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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