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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Dec 16. 2021

스페인 밤10시 세탁기를 돌릴 시간

스페인에선 밤 10시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세탁기며 식기세척기가 돈다. 스페인의 아파트며 호텔들은 대부분 벽이 얇아서 옆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니 그 집 숟가락 몇 개인지 훤히 알 정도라는 건 굳이 이웃사촌 정도의 사이가 아니어도 몇 달 살아보면 파악이 된다.


조용히 쉬어야 할 시간에 왜 세탁기가 돌고 식기세척기가 작동을 할까. 간단하다. 돈 때문이다. 시간대별로 전기요금을 차등 적용해서 어쩔 수 없이 맞춰 살게 된 것이다. 아이 있는 가정은 거의 예외 없이 애들이 집집마다 불을 끄고, 전원 코드를 뽑고 다닌다는 얘기가 학부모들 단톡방에 올라온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5시 10분 전후가 되는데, 오자마자 바로 샤워를 한다. 가스보일러이지만 아이들에겐 6시부터는 무조건 가장 비싼 요금이 나오는 걸로 각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서둘러서 한다.


스페인의 전기요금 체계는 2021년 6월 1일부터 시간대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1) 월-금 평일 기준

최저 00-08 / 일반 08-10, 14-18, 22-24 / 최고 10-14, 18-22

2) 토, 일, 공휴일

24시간 최저 요금대 적용

스페인의 전기요금제 신호등 안내판


문제는 최저와 최고 시간대의 금액 차이가 2배 가까이 난다는 점이다. 그러니 일반 가정에선 다들 단체 합숙 기숙사나 군대 일과와 같이 가급적 일반 또는 최저 요금 시간대에 맞춰 생활하게 되었다.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아내의 식사 준비도 마찬가지로 미리 서둘러 준비해서 6시 전에 마친다. 6시에 저녁을 먹고, 최대한 전등을 적게 켜고 각자 할 일들을 한다. 겨울인 지금은 저녁 5시 반만 돼도 어둑어둑해지기 때문에 전등을 안 켤 수 없는 상황이지만, 써머타임을 적용하던 여름에는 아예 밤 10시가 될 때까지 어떻게든 안 켜고 버티곤 했다.


특히나 큰 아들은 동생 중 누구 하나 불을 켜면 그 즉시 전기 아끼라며 불을 껐다. 휴대폰 충전도 안 했고, 디지털 피아노는 열지도 않았다. 컴퓨터는 물론 태블릿도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양초를 꺼내 들고 성냥으로 칙! 하고 켜서 동굴 같이 긴 중앙 통로를 촛불 들고 다녔다.


영락없이 내전 중이거나 전쟁 직후의 상황 같았다. 그럼에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웃픈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순간들이다. 하나 더, 전등 없이도 의외로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중에 애들이 크면 그러겠지, 라떼는 말이야~


코로나 시국에 수입 없이 지출만 생기다 보니 이게 우리 가정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아빠가 직장을 다녀도 회사 정책으로 감봉이 되고, 엄마가 맞벌이로 나갔어도 근무일 자체가 줄면서 수입이 줄어드는 일이 되니, 다들 그렇게 살아도 그리 흠잡힐 일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도 여기는 어디인가. 이게 21세기의 현실 맞나.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빨던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황당하고 어이없으면서도 달리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니 받아들이고 살았다. 스페인 뉴스에선 아주머니가 초를 태우고 지낸다는 인터뷰가 나오고, 할머니가 껑충 뛴 전기 요금에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전기요금 차등제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거리엔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하고, 성탄트리 점화도 하고, 골목마다 루미나리에가 가득한데, 저 전기는 어디서 끌어와 감당하는 건지 궁금하다. 하나도 덥지 않은 수족냉증의 추운 겨울인데도 로터리 분수대의 물은 펑펑 솟구쳐 오르고, 집집마다 반짝이는 전구는 집안 식구 그 누구도 나오지 않는 베란다에서 제 역할을 다 한다.


스페인은 살면 살수록 21세기의 자본주의 사회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정말 많다.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고, 허탈하면서도 웃기고, 심각해지다가도 너털웃음으로 산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여행스케치의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그래, 다 거기서 거기지, 이게 뭐 그리 대수냐 하며 회의감 인지 여유인지 모를 묘한 여운이 감돈다. 나중에 지나고 나면 다 추억으로 웃을 일일 텐데. 스페인 살이 10년차에 인생 10회차를 사는 기분이랄까. 오늘도 변함없이 야심한 시간, 우리 집과 이웃집에선 세탁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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