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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30. 2021

명절도 결국 사람을 알기 위한 것 아닐까

스페인에서 떠올리는 그리움

긴 연휴를 선사해 준 추석이 끝이 났다. 이미 10년 넘게 15년을 해외에서 보내다 보니 추석이라 해도 문자나 전화와 같은 연락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 아이들은 학교 가고 나는 집 또는 일터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설은 그나마 아이들의 방학에 맞물려 여기서도 들뜬 기분으로 보내지만, 추석을 쇤다는 건 더는 나의 얘기가 아닌 게 되었다. 어렸을 때 느낀 감정의 추억으로 추석은 기억 한편에 자리 잡았고, 꺼내 볼 때마다 바스러지는 앨범 속 사진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어렸을 때는 방학과 명절이면 언제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하시던 스텔라 88을 타고 멀리 시골까지 내려갔다. 아버지의 고향인 화순까지 집에서 300km 남짓 하는 거리인데도,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인구가 한국보다 4, 500만이 적지만 땅은 다섯 배나 넓은 스페인에선 두 시간 반이면 충분히 갔을 거리다. 


차 안에서 꼼짝없이 보내야 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려가는 동안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들이 몇 있었다: 도로 옆에 누렇게 익어 바람 부는 대로 넘실대는 논 (이미 추수가 끝나 때때로 비어있기도 했지만), 곁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들 (스페인에선 코스모스가 없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김상희 씨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노래가 나오고 (지금은 들으면 코끝이 시리다), 마지막으로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놓치지 않고 맛보던 간식들. 


광주 집에 먼저 들렀다가 짐을 싣고 다시 화순으로 내려가면 아버지는 언제나 형제분들 중 제일 먼저 도착하셨다.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성향의 아버지는 도착하셔도 짐을 꺼내자마자 바로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간판도 없는 동네 가게에서 담배를 몇 보루씩 사서 어르신들께 부지런히 인사를 다니셨다. 


연한 핑크빛과 자줏빛으로 된 한복으로 갈아입고 집집마다 두루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리면, 친척 어르신들은 언제 또 이렇게 커서 왔느냐며 반가워하셨다. 어느 분이 어느 분이신가 잘 몰라 헷갈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몇 년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얼굴을 익히고 나와 또는 아버지와 어떻게 얽힌 관계인지를 알게 되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인사는 잠깐이었고, 실상 내 관심을 끌던 것은 어르신들 집에서 키우는 시골개(똥개)와 닭, 오리, 토끼 등 다양한 동물들이었다. 집집마다 다니며 인사가 이어지는 동안 할아버지 댁에는 사촌뿐 아니라 육촌 형제들까지 모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북적북적 모여 활기를 띄우는 그런 명절이 어린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 



추석을 기념해 아버지께서 그리신 시골의 산과 강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매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보내다 이렇게 단출하게 가족들과만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명절은 분위기로 떠올려지는 게 컸다. 아쉬운 점은 기억 속 어르신들과 친척들의 얼굴이 갈수록 흐릿해져 가는 점이다. 명절은 다른 아닌 사람을 기억하고자 모이는 자리인데, 나는 그분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살짝 다른 얘기지만, 스페인어와 프랑스어에서는 '알다'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본다 : 스페인어는 saber(사베르)와 conocer(꼬노세르), 프랑스어는 savoir(사브와르)와 connaître (꼬네트르)로 나눈다.

saber/savoir는 무엇인가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방법 위주로 안다는 것이고, conocer/connaître는 경험을 통해 친숙하게 알게 된 경우에 사용한다.


신문이나 책, 인터넷 등을 통해 국가와 도시 이름을 알고, 피아노의 역사와 음 생성의 원리를 알며, 유명인사의 신상정보에 대해 안다고 할 땐 saber/savoir를 쓰지만, 그 나라와 도시를 여행으로 다녀오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친구를 만나서 안다고 할 땐 conocer를 써야 한다. 


다시 말해 유재석 씨를 안다는 건 saber/savoir를 쓰겠지만, 내 가족이나 친구를 얘기한다면 conocer/connaître를 써야 맞다. 만약,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거꾸로 사용하면 무슨 뜻일까? 즉, 어떤 유명연사를 안다는 말에 conocer를 쓰고, 가족을 안다며 saber를 쓴다면, 어떤 의미가 될까?


나는 그 유명인사를 이름만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식사도 같이 하고 영화도 같이 보고 여행도 다녀봤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반면, 피붙이의 가족에 대해서는 기껏 해 봐야 이름, 키, 생년월일 등 호구조사로 아는 것에 그친다는 뜻이 된다. 별 의미 없이 툭툭 내뱉을 한 단어에서 읽어낼 감정과 뉘앙스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 되는 것이다. 


엄청난 기술 발전으로 연락하는 방법은 그 어느 때보다 쉽고 편리해졌지만, 연락하려는 마음은 과연 얼마나 가까워져 있고, 자주 손이 가는지를 생각해 본다. savoir와 connaître 사이에서 마음의 저울을 재본다. 나는 당신을 saber로 아는지, conocer로 아는지, 정보와 데이터로 받아들이려는 건지, 진솔한 마음을 나누는 경험으로 마주하려는 것인지. 궁극적으로 얼마나 내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명절이라 다들 한 자리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얼굴을 맞이 하지만, 서로 얼마나 가까운지는 저마다 거리와 온도 차가 있을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어색한 미소 속에 나누느니 차라리 분주하게 주방과 거실을 다니며 일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일언반구 관심도 없고, 딱히 연락도 주고받지 않다가 다들 모인 자리에서 면접 질문 리스트라도 뽑은 거 마냥, 꼬리에 꼬리를 물며 2단 3단 콤보 세트로 나오는 질문세례에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왜 그럴까.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의무와 책임만이 남아서?


어리고 남자였던 나는 딱히 스트레스가 없었다. 하지만 언론 기사와 브런치의 글을 읽어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그나마 물 빠져 바래져 가는 추석빔을 입은 내 기억은 이제는 모르던 걸 알게 되어 미루어 짐작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까지 번져 마음이 쓰라리다. 나는 그래도 좋았으니 남도 좋았던 것일까. 


한복 입고 낫질하며 베던 이삭, 할머니와 조몰락거리며 빚어내고 갓 쪄낸 송편, 어머니들이 모두 모여 방금 부쳐낸 고소하고도 짭짤한 전, 이모님의 깔끔하고 담백한 김치 만둣국, 풀어낼 추억 꾸러미가 끝이 없어 감사하다. 하지만, 명절이라는 '행사'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추억은 얼마나 될까.


마흔이 넘는 나이에 명절 속 분주히 오가던 '가족'과 '친척'의 면면을 넘고 싶다. 돌아가신 분을 회상하려고 산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데, 나는 정말 누구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한분 한분을 '인격체'로 알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온다. 촌수와 호칭보다는 이름으로 만나고 싶다. 오랫동안 못 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실은 일가친척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도 마음은 동일하다.

 

아버지께서 손수 쓰고 그린 그림을 보니 더더욱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더불어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보내던 옛 추억을 그리는 마음이 당겨진다. 분위기에 취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분위기를 만든 분들을 찾아가 뵙고 싶은 것이다. 


나는 당신을 saber/savoir가 아니라 conocer/connaître 하고 싶은데, 당신도 그러하신지... 말끝을 흐린다는 건 자신감이 없다는 반증이자, 확신에 차 있지 않다는 표현이기에 쓰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지만, 당신에게 부담이 되는 것 같아 물어보고 싶어도 대답까지는 강요할 질문이 아니기에 혼잣말로 하고 돌아서는 내 모습이다. 추석은 이미 지나고 9월의 끝인 오늘.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이 시점에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작가님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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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주제는 우리의 명절, 추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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