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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Oct 08. 2021

친구 따라 강남 가니? 난 책 따라 프랑스 간다.

이원복 <먼나라 이웃나라>

아마 그때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우리나라 수준을 후진국도 선진국도 아닌 애매모호한 개발도상국, 그마저도 개도국이라는 어감도 이상한 단어로 칭하던 때. 좁은 땅에 복닥복닥 모여 살아 그런지, 뭐를 해도 항상 비교하던터라 시험만 보면 바로 반에서 몇 등, 전교 몇 등 이런 식으로 등수 매기기가 너무나 당연하던 넘어가던 때. 시험 성적, 콕 집어 말해 등수에 경쟁이 붙던 때 말이다.


사실, 성적 경쟁이란 말 자체가 우습다. 내 성적이 친구 성적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냔 말이지. 그 경쟁은 뭘 해도 늘 마음이 편치 않고, 뭐든 죽기 살기로 아등바등, 악바리 근성으로 해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노력을 기본으로 깔고, 근면과 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경향이 문화이자 의식으로 심겨 있어 가능했다.


이런 신조는 강조를 넘어서 강요될 때가 많았다. 그런 강요는 선생님의 사랑의 매, 일명 매타작이 정당화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왜 이유와 본질은 잘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공부하고, 백점 만점이라는 결과물에 집착해야 했을까.


선진국이 되지 않으면, 개도국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일까. 그 불안은 코앞에 있는 북한 때문에 더욱 증폭된 것일까. 지금이야 피식 거리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할 일이지만, 당시 어린 나와 친구들 사이엔 비약적인 상상 속 얘기가 논리 보다도 중요했다. 왜 우리가 명칭도 이상한 개도국이냐며, 선진국이 된다는 건, 또는 선진국에 산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다 결국 주말에 본 맥가이버 드라마나 할리웃 영화 얘기나 하는 걸로 끝나곤 했다.


그 당시 국민학생들에게 선진국이란 딱 두 나라뿐이었다 : 미국과 일본. 하지만 일본을 선진국으로 인정하기엔 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실상 우리에겐 미국이 선진국이자 세상 전부였다. 그렇다고 일본 제품까지 싫다고 할 순 없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탄성을 자아내는 품질이었기에 일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좀 산다 하는 집 애들의 책가방에는 일단 과자, 사탕, 젤리 등 먹는 것부터 시작해 학용품과 보온 도시락통 등 일제와 미제 물건은 필수템이었다.

 



그렇게 미국과 일본만이 전부였던 내게 세상에는 다른 나라도 있다고 알려준 책,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닌 저마다의 언어와 고유의 문화로 살아가며 자신들의 판으로 전 세계를 포맷하고 선진국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있다며 세상에 대한 눈을 뜨라고 울리던 책이 바로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였다.


어른이 된 지금은 오류도 많이 보이고, 동의하지 못할 점도, 심지어 읽다가 불편하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대목마저 자꾸 눈에 밟힌다. 그럼에도, <먼나라 이웃나라>는 책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소중한 나의 타임캡슐이다.


노래가 꽂혀 계속 듣다 보면 테이프가 늘어나듯, 한 책을 붙들고 다독하다 보면 어느샌가 무언가 묻거나 찢어지는 일이 생긴다. 내 손에서 10여 년, 고모네에서 10여 년, 다시 내 아이들의 손을 거친 지 10여 년이 지났다. 비닐로 둘러싼 표지는 누렇게 변색되고, 종이는 까끌함이 느껴질 정도가 되었고, 때때로 바스락 거리는 소리마저 들린다. 그럴 때마다 책이 "야, 나도 너처럼 나이 먹는다, 살살 좀 다뤄라." 하는 것만 같다.  


나에게 처음으로 유럽을 알려준 <먼나라 이웃나라>. 당시엔 6권이 전부였고, 전부 작가의 손글씨로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그림은 우리나라 명랑만화 풍이 아닌 스머프 작가 페요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처럼 네덜란드가 아닌 프랑스가 유럽 문명 개요와 함께 제1권에 소개되어 있었다. 책은 한 권에 끝나지 않고, 다음 권으로 이어졌다. 절대 단행본으로 구입 못할, 한번 사면 무조건 마지막 권까지 줄줄이 다 사야만 되는 편집자와 마케터의 고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독일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각 나라의 역사를 간략히 훑어보는 것과 함께 그들의 문화 소개가 무척 흥미로왔다. 책으로만 읽는데도 그들의 생활 방식은 내게 문화충격을 안겨 주었다. 저렇게 살아도 나라가 돌아간다고? 당시에 내 머릿속에선 내가 살고 싶은 스타일은 범생이었다. 하라는 거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안 하는 거. 일탈=죄로 생각하던 나였다. 그러니 누가 봐도 반듯, 단정, 규율에 철저한 도이칠란트(독일)인데, 마음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을 것 같은 사고뭉치, 문제 투성이 프랑스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스페인 편이 나오려면 20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유럽의 역사는 한중일 세 나라 보다도 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읽은 역사 부분은 다른 나라에서 또 나오는 반복이 잦았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가랑비에 옷 젖듯 자주 읽다 보니 연도며 중요사건들이 스토리텔링으로 술술 들어왔다. 살면서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 그나마 성경은 열심이 특심이라 열다섯 번을 읽었다. 하지만 <먼나라 이웃나라>는 살짝 조미료를 쳐 본다면, 사촌에게 책을 전하기 전까지 일이백 번이 뭐야, 골백번도 더 읽은 것 같다.


영화 <굿 윌 헌팅>을 몇 번이고 보다 보면 어느새 로빈 윌리엄스에 빙의가 되어 대사며 손짓을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듯, <먼나라 이웃나라>의 사각 칸 안 인물의 이야기며, 작가의 설명 중 중요 정보는 시나브로 장기기억으로 저장되고 있었다. 딱 거기서 그치면 좋은데, 여기에 굳이 기억 안 해도 될 그 분만의 약간은 억지스러운 아재 개그, 인물 표정과 눈빛까지 타투처럼 남겨져 있다는 게 함정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페이지마다 활자를 다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여기에 열심으로 파고들던 성경까지 곁들여졌지만, 당시엔 박물관 유품처럼 고이 모셔진 상태로만 있었다. 그러다 20년도 훌쩍 지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재가 되었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가이드가 되어 시너지를 일으키며 다시 튀어나오다니, 이리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시간이 지나 이원복 교수님의 편향성 문제나 객관성에 대한 지적은 차치하고, 책의 서술 방식에 대해 주목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세계사하면 연대기와 사건 암기와 같은 단순 나열성 사건기록으로 여겼는데, 저자는 그런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경우와 비교 또는 대조해서 설명해 가는 방식이 신선했다. 그들만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끝나버릴 일을 우리의 경우로 끌어 들여오니 한 번 더 관심을 갖고 읽어보고, 정말 그런가? 하며 생각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마치 사도행전 속 베뢰아 사람처럼)


저자가 역사 속 인물, 또는 현지인과 인터뷰하는 듯 진행하는 말투도 내가 같이 있는 느낌을 주어서 집중을 놓치지 않게 했다. 덤으로 각 나라별 언어를 쓰고 우리말 음가를 달았는데, 이게 언어 덕후인 내게는 그야말로 취향저격이 되어 단박에 사로잡혔다.


프랑스, 도이칠란트(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나라는 여섯, 하지만 언어는 다섯. 각 나라별 발음은 겨우 알파벳만 알던 내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 자체였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어는 희한한 글자부터 시작해서 (ç 와 같은 독특한 자음부터 모음 위에 붙은 각종 악상 accent 기호들: é, è, ê, ë), 그야말로 괴팍하고 창피할 정도로 이상하며, 우리말로 정확하게 쓰기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발음들이 산재해 있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늪처럼 헤어 나오질 못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의 개인주의를 설명할 때 "이건 내 문제, 그건 네 문제, 나머지는 나와 상관없어"라고 나온다. 그 문장 중 하나인 c'est ton problème (쎄 똥 프로블렘, 그건 네 문제고)을 읽을 때마다 브레이크가 걸린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똥똥 거리면서 상스럽게 말하지? 쟤들은 안 이상한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일세. 이런 말을 낭만적이라 하다니.' 이 생각에 빠져서 소리 내어 읽으면서 혼자 낄낄 거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별도로, 프랑스인들은 심지어 똥을 먹기까지 한다. thon똥은 그들에게 참치이기 때문이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맛보기로 접한 프랑스어의 매력은 나를 결국 외국어 고등학교 진학 당시 프랑스어과를 선택하게 했다. 워낙 쟁쟁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중학교 때의 우물 안 개구리 영어 실력으론 '나 영어 공부 좀 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프랑스어는 그들의 혁명 사상처럼, 만민을 평등하게 만들어 준 (물론 그래도 프랑스에서 살다온 친구가 둘이나 있었지만) 고마운 도구이자 친구였다.


이원복 교수가 뿌린 프랑스어의 씨앗은 고교 시절을 지나 아예 대학 전공까지 자리 잡았다. 종종 시험 때는 감당 못할 웬수가 되어 병 주고 약 주는 녀석이기도 했다. 졸업 후엔 프랑스어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슬로바키아에서 살고, 그러다 스페인까지 와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프랑스어는 모로코로 출장을 가거나, 지금 사는 동네에서 모로코 사람을 만날 때 단박에 상대방의 경계심을 지워주는 고마운 친구로 돌아왔다.


철부지 아이는 아빠가 되었고, 그 아이가 손을 탄 책 귀퉁이에 아이의 아이가 손때를 묻힌다. 아빠가 좋아하던 책을 아들도 좋아하니 둘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아들은 자기가 읽은 내용을 정리해 말해 보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아빠는 아들에게 좋은 책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며 내용의 반전을 띄워 달리 보게 만든다.


여담으로 학생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로 만난 이원복 교수에 대한 믿음은 당시 절대적이라 할 만큼 대단했다. 그의 저서 중 첫 작품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책을 다 살 정도로 애정이 컸다. 현대문명 진단 시리즈, 가로세로 세계사 시리즈, 세상만사 유럽만사, 자본주의 공산주의,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 신의 나라 인간나라, 사랑의 학교,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끝이 없다.


먼나라 이웃나라 만큼은 아니어도 몇 번씩 거듭 읽으며 나를 키워준 책이다. 이제는 이전만큼의 절대적인 신뢰는 덜하다. 다만 뭐라고 하시든 이해하고 받아주는 (감히) 벗이 된 느낌이다.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던 그의 책에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일이 생긴다. 애정 어린 비판이 자꾸만 담긴다.


나와 다른 언어, 문화, 역사에 눈을 뜨게 해 준 책. 무엇을 대할 때마다 왜? 라는 질문을 항상 품게 만들어 준 책. 이젠 내 앞에서 나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곁에서 토론을 나누고 건전한 비판을 주고받을 오랜 지기知己이자 세월 앞에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다. 고마워, 네가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왔잖아. 살살 다룰게, 오래 함께 해줘, 삭지 마.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 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 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작가님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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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주제는 '내 인생을 바꾼 책 한 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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