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참합시다
저녁 6시, 스페인 사람들에겐 3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지만, 스페인에 9년차를 살아도 저녁 시간만큼은 한국식 시간을, 아니 스페인을 제외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처럼, 평일의 그날도 식구가 다 같이 모였다. 이 날은 둘째의 바램의 따라 아내의 손에서 따끈따끈 갓 튀긴 치킨을 먹고 영화를 보려고 했다.
띵동. 이건 초인종 소리다. 누군가 우리집 코앞까지 왔다는 증거.
보통은 아래층 현관이 닫혀 있기 때문에 어느 집에든 오려면 벨을 눌러서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스페인에선 예쁜 벨소리가 아니라 원초적일 정도로 "찌지지직" 전기가 통하는 소리로 모두를 깨운다. 그러면 화들짝 놀란 나는 수화기를 들고 조심스레 "누구세요..?" 아니다, 여긴 스페인이니 "¿Quién es?"라고 물으며 꼭 확인을 거친다. 경비원이 따로 없기 때문에 외부인 출입에 늘 주의를 기울인다.
오는 사람은 사실 정해져 있다, 아마존 배달 아니면 피자집. 하지만 간혹 모르는 사람과도 의외로 말을 주고 받는 일이 있다. 우체부가 우편물을 꽂기 위해 아무 집이나 눌러서 문만 얼른 열어 달라는 경우도 있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서. 띵동. 저녁 6시에 우리집 문 앞까지 와 있을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열어보니 적십자사에서 왔다며 자기 소개부터 시작해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 때만 해도 난 내가 간단히 네, 그렇군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 끝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야무진 착각이었다. 설명하는 중에 윗층에서 동료로 보이는 사람이 일을 마치고 내려가는지 인사를 건낸다.
새해를 맞아 햇수로 9년차에 접어 들고 연배도 나름 차 가서 그런지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음에도 얼추 8할은 이해한다(고 또 착각한다). 청해 실력 보다는 관록의 나이로 퉁쳐 이해한 바로는 다음과 같았다.
작년 한해 우리가 코비드 - 여기선 코로나가 아니라 코비드 19 라고 얘기한다, 맥주가 연상되서 그런걸까, 아님 왕관 (스페인어로 corona 가 왕관이라 그 맥주의 상표가 바로 그것이다) 이란 뜻 때문에 그런걸까 - 로 얼마나 힘들었니. 그런 와중에 추운 겨울까지 맞이했어. 얼마 전에 눈와서 아직까지 길 다니기 힘든거 알지. 그런데 우리 보다 더 어려운 애들이 있어. 한끼 자체를 고민하는 애들. 어른은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하잖아. 그런데 애들은 힘들어. 이런 애들에게 우리 적십자가 후원을 해준단다. 너도 들어봤지.
그런데 너 어디서 왔니. 오 한국이라고. 오 그렇구나. (다행히 이 친구는 남한인지 북한인지 하는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얼른 후원금만 받고 일단락 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선 얼마나 살았고. 8년? 아, 9년이라고. 오, 그런데 너 스페인어 잘하네. 아냐, 10년 넘게 살아도 못하는 외국인 많은데 (그래봐야 중국인일텐데 내가 아는 중국인은 다 잘 한다), 너 정도면 진짜 발음도 좋고 잘하는거야. (기분이 좋아야 기부금도 크게 낼테지)
자, 이게 어떻게 후원하는거냐하면... 그래, 그 정도 금액도 괜찮긴 하지만 더 하는 사람도 주위에 많아. 여기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후원해. 이거 봐봐.
응? 아, 그래, 그렇구나. 코비드로 너 많이 힘들구나. 그래 지금은 관광객 얼마나 와. 아, 그치, 그렇지, 아무도 안 오겠구나. 하긴 우리도 정말 힘들어. 나는 저 윗동네 사는데 말이야 내 친구들은 지금 말이지... 그래 나중에 상황 좋아지면 언제든지 금액이나 횟수 변경할 수 있으니까. ... 고마워.
그냥 잠깐 누군지만 알아보려고 나간 아빠가 30분이 넘도록 문 앞에서 얘기를 하고 있으니 아이들은 신기해서 보러 나왔다. 이미 저녁은 다 먹은 뒤였다. 그 와중에 둘째 녀석은 아빠가 하필 타이밍이 신분증을 적십자 직원에게 건낸 걸 보고,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이내 큰소리로 말한다. "엄마, 아빠가 처음 보는 아저씨한테 신용카드를 줬어요. 어떡해요." (아, 초등학교 4학년인데 신분증과 신용카드도 구분을 못하다니, 이거 대체 누구를 닮아..)
홈쇼핑에서 보험 설계시 약관 읽어주는 속도로 후원에 대한 모든 절차와 방법에 대해 상세히 안내, 아니 주입 받고, 중간에 바로 적십자사에서 확인 전화오는 것도 받고, 다시 설명 듣고, 마지막에 싸인까지 받고 나서야 그 친구는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너무도 조용한 아파트. 음, 이상하네. 분명 이런 식으로 하면 당장 옆집에서 하는 거 생각해 봐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어야 하는데 이 사람 오기 전에도 그렇고 내가 후원 계약 맺는 중간에도 그렇고 이 아파트에 마치 나하고 이 친구만 있는 듯 사방이 조용한 이 느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까 윗층에서 내려오며 인사하고 가던 친구는 아랫집은 다 했다는 거였을까. 그럴리가. 여하간 몇 군데 못 돌았을텐데...
아, 맞다. 여기 대부분은 자가주택이지. 그러니 한번 후원하면 어차피 어지간히 힘들어진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끊을리가 없을테니. 세입자는 어쩌면 나뿐 일지도 모르겠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뒷통수에서 둔탁한 느낌이 들었다.
직원하고 나눈 얘기 중 한국 적십자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헌혈에 대해.
첫 헌혈 경험은 첫 사랑처럼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26년 전 11월 26일 일요일 오후였다. 예배 끝날 때 헌혈차가 와 있으니 헌혈에 동참하라는 거였다. 마침 나는 헌혈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약간 겁이 났지만 헌혈 버스 안에 오르니 간호사가 친절히 맞아 주었고, 쵸코파이와 작은 캔음료, 그리고 재즈CD를 선물 받았다. 그 날은 마침 내가 너무도 아끼는 친구의 생일이기도 해서 나는 그 헌혈증을 그 친구에게 선물을 줄 때 카드에 넣어 주었다.
학생의 신분에서 내 몸으로 무언가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헌혈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이후로 꾸준히 해 왔다. 전혈에서 성분헌혈이 도입되고 부터는 한달에 두번씩 하기도 했다. 주위에선 나보고 내가 빼빼 마른 까닭이 너무 지나치게 헌혈을 해서 그런거라고 했다. 1995년 겨울에 시작해 2006년 겨울까지, 11년간 50여회의 헌혈을 통해 헌혈증을 모으고 그걸 긴급히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선뜻 내놓곤 했다. 누군가 도움을 요청할 때 할 수 있는게 말 밖에 없어 애만 태우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다 때마침 그 필요로 하는게 내게 있어 그것을 내놓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뿌듯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는건 십수년이 지나도 가슴 뛰는 흥분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헌혈유공장 금장과 함께 적십자사의 손목시계가 전해졌을 때, 좋은 일 하는게 혼자만 간직할 행복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인정받는게 된다는 점에 무척 고무되었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더 해 봐야겠단 다짐을 했다. 그러나 슬로바키아로 한번 나오게 된 일이 이렇게 오래 가게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그래서 컴패션을 통해 인도의 한 아이를 후원하기 시작했고, 한국에 휴가차 갔을 때는 초록우산 재단을 통해 또 다른 후원을 시작했다.
후원을 하면 할수록 돌아오는 건 비어져 가는 통장이 아닌 채워져 가는 마음이었다. 학생을 지나 직장인이 되자 내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좋지만 재미없는 일이 아니라, 할수록 기쁨이 몇 배의 복리가 되어 돌아오고, 더 벌어서 더 베풀고 싶다는게 성현의 가르침이나 종교적인 계율을 넘어, 말로 다 못할 강렬한 열망이자 씨앗이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다 기간이 만료되고 삶이 바빠지면서 이어가질 못하고 하나 둘 놓쳤다.
식탁으로 돌아오니 따끈했던 치킨은 이미 식었지만, 마음에선 따스한 군불이 올라왔다.
오래 전 잊혀진 그 씨앗 하나를 스페인에서 다시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