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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Feb 04. 2022

스페인 한량의 브랜딩

처음 시작은 대화에서였다.


ㅡ 가이드님, 한량 같으세요.

ㅡ 네? 한량이요? 제가요? 왜요?

ㅡ 스페인 곳곳을 놀러 다니시잖아요.

ㅡ 아, 그렇네요. 저는 놀러 다니는 게 일이지요. 하하하

ㅡ 그런데, 그냥 노는 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역사와 인물 등의 이야깃거리를 재미있게 풀어 주시잖아요.

듣다 보면 저도 한량이 된 느낌이에요, 하하.

ㅡ 그럼 성당이나 미술관이 아니라 산천초목 계곡을 찾아다녀야겠어요.

ㅡ 안 그래도 왠지 가이드님이랑 있으면 시도 한 편 읊고, 노래도 한 소절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고, 그림도 한 점 그려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하하하


그렇게 이국의 땅 스페인에서 한량에 대한 이미지를 발견했다.

그러다 또 다른 팀에서 얘기가 나왔다.


ㅡ 가이드님, 가이드님을 보면 일과 노는 게 구분이 없는 거 같아요.

ㅡ 그래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신경 써서 하는 데도 미흡한 점이 많은가 봐요.

ㅡ 아니요, 그게 아니라, 본인의 일을 정말 너무나 좋아서 하는 게 보여서요.

ㅡ 아, 그런가요? 안 그래도 전에 어떤 분이 저보고 한량 같다고 했어요.

ㅡ 어머, 정말이네요! 놀고먹는 한량, 아주 딱이세요!

ㅡ 선생님이 봐도 그렇게 보이세요? 어휴, 큰일이네요. 저는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 건데.

ㅡ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열심히는 하죠. 하지만 즐기는 사람은 몇 되지 않잖아요.

 

결국 천직에까지 이르렀다.


ㅡ 가이드님은 가이드 일 하는 게 정말 좋으신가 봐요.

ㅡ 그렇게 보이나요? 네, 맞아요. 전 정말 이 일이 너무나도 좋아요.

ㅡ 본인이 먼저 즐겨서 하는 게 보이니까 보고 듣는 우리도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요. 

가이드가 본인에게 천직인가 봐요, 가이드님.

ㅡ 한량처럼 놀고먹으면서 천직이라는 말까지 들으니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어휴.

ㅡ 최고네요, 우리는 돈 쓰면서 노는데, 가이드님은 놀면서 돈도 벌고, 적성에까지 맞으니까요. 부럽습니다.

ㅡ 아휴, 아닙니다. 이렇게 나와 쓸 여유가 있는 이사님이 더 부러운 위치에 계시지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분의 예언(?) 같은 조언도 들었다.


ㅡ 스티브, 스티브는 말이야, 내가 보니까 독립해도 되겠어.

ㅡ 헉? 제가요? 휴, 사장님, 큰일 날 말씀이십니다. 저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ㅡ 아냐, 손님들 좀 봐, 그렇게 수다 떨다가도 스티브가 마이크만 잡으면 바로 조용해지잖아. 그렇다고 조는 사람도 없어. 스티브가 전하는 스토리텔링에 빠진 거라고. 그러니 일하더라도, 그냥 가이드만 하다 끝내지 말고, 테마를 내세워서 키워보면 좋을 거 같아. 요즘 잘 나가는 가이드들은... (중략)


본업에 충실한 스페인 한량, La Pedrera, Barcelona, 2019




뭐가 뭔지 당시에는 잘 모른 채 근근이 살아왔지만, 근래 들어 자주 회자되는 '퍼스널 브랜딩'의 단편이 알고 보니 내 삶에 곳곳에 박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걸 리셋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개인 브랜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학원 강사에서 잠시 신학생으로, 직장인으로, 다시 영어 강사로,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있는 지금은 가이드로. 한국에서 슬로바키아를 거치고 스페인으로 오면서 놀고 먹으며 풍류를 즐기는, 그것도 열심히, 심지어 성실히 하는 한량이 되었다. 원래의 기질적으로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익숙한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 살다 보니 환경의 영향으로 드러난 것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가이드' 또는 '문화 해설사'라는 업 속에는 통성명 한 번 없이 스쳐 지나간 사이부터 인연을 필연으로 만든 관계까지 무수한 군상과 경험한 에피소드가 차고 넘친다. 업 하나만으로도 이렇다면, 지금까지 지나간 발자취를 뒤돌아 볼 때, 얼마나 더 다양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취미로 시작한 피아노에서 오보에를 거쳐 지휘까지 이르면서 클래식 음악에 깊게 발을 들였고, 어느새 자녀에게 피아노를 레슨 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큰 아들에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OST를 즐기며 칠 수 있게 하고, 둘째에게 모차르트 소나타를 완주하게 만들어가는 재미와 성취감은,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상당하다. 


우리말과는 다른 소리와 억양의 독특함에 이끌려 시작한 영어에서 출발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살기 위해 슬로바키아어를 배우고, 정착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습득하다가 통역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말에 끝나지 않고, 그곳 사람들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하고, 동시에 나의 모국어와 문화, 역사까지 새롭게 보는 시각을 키워준다.


가이드를 하면서 접한 서양 회화에 흥미와 호기심이 더해지니 인물, 역사, 철학, 사조 등 인문학 분야에 폭발적인 가지치기가 뻗어간다. 생소한 걸 자주 접하면서 익숙해지고, 반대로 그전까지 익숙해졌던 건 다른 시각으로 이국적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면서, 어느새 학습의 수준은 줌 강연까지 이를 정도로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특출한 일 없이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만 살 줄 알았는데, 생각 못한 데까지 이르고, 더 큰 꿈을 꾸기에 이르렀다. 인생의 파편이자 부스러기 같았던 일들이 모아 보니 퍼스널 브랜딩의 단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나서였다. (추천강의 : 오늘도 출근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스테르담님의 퍼스널 브랜딩 VOD 강의)


퍼스널 브랜딩의 명가, 스테르담 작가님, 2021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떼고, 평범한 나로 돌아와 볼 때, 왜 나라는 개인을 브랜드화하려는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취미, 사업, 인기, 영향력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모든 활동은 내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고 싶어서 하는 모든 것이다. 곧, 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남이 나를 이렇게 알아주었으면 하는 인정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이기에, 당연하며, 이를 위해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좋은 건 내가 바라는 나를 세워가는 일이다. 살면서 나를 제일 많이 보고 마주치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 이제는 그냥 보고 지나치는 수준을 넘어서서 나다운 나로 만들어 가려는 작업이자 정체성 수립을 위한 본격적인 공사이다.


하루 세 번 피할 수 없는,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이 있다. 오늘 아침, 점심, 저녁에 뭐 먹겠냐는 질문. 뭐라고 답을 할 것인가.

 

"아무거나" 하는 식의 무성의하게 보이는 대답 말고,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하는 센스 넘치는 답은 이번만큼은 잠깐 뒤로하고, 내가 직접 메뉴판을 들고 (메뉴 없이 어떤 하나만을 파는 전문집이라면 사무실과 집을 나오기 전에) 내 신경계와 기억의 회로가 침샘을 자극하는 걸 콕 집어서 당당하게 "난 이거"라고 말하는 것도 퍼스널 브랜딩의 하나이지 않을까. ㅡ 한편에선, 앞서 두 경우도 각각 까다롭지 않고, 배려심이 넘치는 걸로 브랜딩화 될 수 있을 것 같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 무슨 옷을 입고, 여가시간에 어떤 활동을 하는 편이며, 자투리 시간은 어떻게 활용하고, 쓰는 말투는 어떠한지 등. 이것이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맞추는 브랜딩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내가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고, 미술관을 찾고, 동영상 채널을 검색하며, 여행을 떠난다.


내가 나를 알아갈 필요가 있을까. 물론이다. 사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또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은 말할 것도 없다. 학원 강사 시절, 의외로 학부모가 자기 자식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놀랐다. 상담할 때마다 전혀 다른 얘기가 오고 간다. 


어머니, 그럴 리가요 vs. 선생님,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누가 잘못 알거나 모르는 게 아니다. 그 학생의 페르소나가 자제이자 제자여서이다. 본인의 페르소나 안에서 각각 다르게 발현돼서 그랬을 것이다. 학생의 문제는 어쩌면 학생 자체보다는, 부모와 진심으로 마주해서 터놓고 얘기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바쁘게만 돌아가야 하는 구조에 있는 건 아닐는지.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 세상 어디에도 내 이야기만큼 재미난 건 없어!


내가 나를 알아간다고? 학생 때는 생각만으로도 오글거리는 일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어떤 누구보다 나를 알아가는 일이 제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즐거움과 슬픔이 가득한 화수분이 된다는 걸 나이를 먹어서야 알았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얘기가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본인의 일기장 없이 절대 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했다. (지루한) 기차 안에서 읽을 재미난 게 (something sensational) 필요하니 항상 챙겨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달리 말하자면, 몇 번을 다시 읽어 봐도 본인 이야기만큼 자신에게 제일 재미난 건 없다는 게 아니겠는가. 그 뻔뻔하고도 위트 있는 말로 퍼스널 브랜딩의 근본을 캐는 명언을 남겼다. (내 일기장은 어떨까?) 


학창 시절의 MBTI가 다시 유행하고, 첫 만남에 상대의 혈액형을 물어보거나 사전 조사를 하고, 새해마다 신년운수를 들춰보는 것도 실은 남의 일보다 내 일에 대한 관심사가 커서이다. 내가 나를 알려고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자극이자 동기부여가 된다. 


그렇기에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고자 알아보는, 남들이 볼 때 사소하고 시시해 보이는 것들은 사실 소소한 걸로 그칠 일이 아니다. 어르신들의 생각처럼 쓸데없는 일이라며 치부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과정이야말로 퍼스널 브랜딩의 뿌리가 되는 일이다. 




유명한 소설도 결국 주인공인 누군가의 이야기다. 허구적 인물의 이야기도 베스트셀러가 되어 회자되는 판에 그 무엇보다 리얼리티가 진득하게 배어있는 내 삶과 경험을 전하고 공유하는 건 얼마나 더 가치 있는 일이겠는가. 그 누구의 이야기보다 소중하고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것이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말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외부의 것을 찾아 만드는 게 아니라, 본인의 삶을 가만히 관찰하고 파 내려갈 때 가능하다. 가지고 있는 페르소나를 세분화, 구체화할수록 다양한 스펙트럼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스펙트럼에 단조로운 이분법은 없다. 흑백이라 해도 그라데이션gradation이 있고 회색지대가 있는 법이다. 


오늘도 스페인 한량의 브랜딩거리는 일상에 가득하다. 아침마다 아이들을 깨우는 분주한 아침으로 시작해, 등하교 오가는 길 아이의 재잘거림, 아이를 기다리는 사이 나눈 학부모와의 대화, 아내가 차려준 맛난 점심과 저녁 식탁, 오랜만의 안부 전화 속 수다, 씻기고 재우고 평안 속에 마치는 하루, 그 사이 부지런히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문장을 필사하며..., 일상을 재발견하면 모래마저 반짝이는 금빛으로 변한다.

 


공무 수행 후 마이바흐 안에서 (카톡 채널 프로필, 좌측) / 개인 브랜드 (카톡 프로필, 중앙) / 아내 덕에 잘 나온 스티브 (브런치 프로필, 우측)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을 담아가고 있습니다. 2월의 주제는 <브랜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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