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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18. 2022

이유도 모른 채 눈이 부었다

살다 보니 별일

photo by linh-ha at unsplash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주말 아침. 일어나 눈을 뜨는데 평소와 달랐다. 어딘가 묵직하다. 배인가 싶은데 아니다. 방광 역시 아니다.


아침을 맞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휴대폰 확인? 화장실 가기? 다 아니올시다. 너무 당연해서 무슨 소리야 할 수도 있지만 아침에는 눈부터 뜨는 게 우선이다. 눈 위에 돌을 하나 얹은 느낌이랄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라 손이 더듬거리며 눈두덩으로 간다. 눈두덩은 야트막한 동네 공원 언덕 마냥 볼록했다.

대자마자 자동으로 악! 하는 소리가 나온다.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니 전날 누군가와 제대로 주먹다짐을 했을 법한 모습의 노숙자가 떠억하니 있다. 영화에서 달걀로 멍든 부위를 굴리던 게 언뜻 생각났지만, 지금의 상태는 달걀은커녕 메추리알도 댔다간 바로 동네방네 이유도 모른 채 눈 부어 난리 난리 생난리 치는 이상한 놈이 있다고 다 알릴 판국이었다.


눈두덩이 얼마나 두툼하게 부었든지 어머니께서 쓰시던 에센스 캡슐 세네 개는 족히 포갠 것 같다. 그냥 부은 거라 하기엔 색상은 또 좀 고운가. 스페인 거리에서 흔히 보는 키코KIKO 화장품 매장에 가서 얼굴을 반으로 나눠 색조 화장 전과 후를 비교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붉은빛이 돌면서 보라색을 곱게 브러시로 서너 번 지나가듯 그러데이션 효과가 아주 그만이다.

'헐, 부은 것만 아니라면 이 정도면 나름 광고 찍어도 좋은 색감인데.'

아니,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대체? 이 정도면 정신은 반쯤 나가 있다고 해야 할 거다.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떼야겠다는 생각에 살금살금 검지 손톱으로 건드려 본다. 지난달 스페인 전역을 강타한 사하라 사막의 모래 먼지 마냥 금빛 눈곱이 곱디곱게 떨어져 나간다. 해산물 빠에야에서 입 다문 홍합을 떼어내듯 부풀어 오르고 눈곱으로 풀칠된 눈을 한번 떼고 나니, 이번엔 잘 감겨 지지도 않는다. 꿈인지 생시인지, 오늘이 만우절인가, 아님 몰래카메라라도 설치를 한 건가.



이대로 그냥 지나가기엔 아무래도 자연적으로 해결될 거 같지가 않다. 주말이라 문을 연 곳은 당연히 없다. 그렇다고 응급실에 가자니 과연 그럴 정도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가겠지만, 뭐든 기다리는 게 일상인 스페인에서는 응급마저도 응급이라고 예약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농담으로 할 정도로 느리다.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예약 시간이 남아 있어 바로 신청했다.


하루가 지나자 눈은 아예 놀란 복어 마냥 팽팽하게 불어 올랐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마자 눈이 '나 여기서 그만 나갈게. 그간 고마웠어.'라고 인사하듯 쏟아질 것만 같다. 아예 처음부터 감겨 있으면 모르겠는데 어설프게 뜬 또는 뜨게 된 눈은 도리어 앞의 사물을 보는 데 방해만 된다.


눈을 감고 있자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되고, 눈을 뜨자니 간지러움 때문에 자꾸 눈을 깜빡이고, 그게 다시 통증이 되어 눈을 괴롭힌다. 눈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이 약해지는구나. 1차 통증을 지나 2차 깨달음이 온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 갑작스레 닥쳐온 몸의 불편은 나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 간다.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가도 선글라스를 벗을 수가 없다.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자니 시시때때로 부는 바람 때문에 눈이 힘들다. 안으로 들어가니 밝은 대낮이라 불도 켜놓지 않은 공간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음식 주문을 하고, 음료를 마시며, 칼질을 해서 음식을 먹는다. 본의 아니게 연예인병 환자가 되었고, 꼴에 재수 읎는 관종이 되는 건 덤이다.


이런 답답함에 더 고구마를 얹는건 의사도 딱히 원인을 모르겠다는 진단이다. 어느 정도 마음속에서 대비한 일이긴 하지만 막상 들으니 당황스럽다. 해외에서는 사지가 잘려 나가는 일이 아닌 이상 정말 대단히 심각하고 긴급하며 중요한 일로 여겨지는 일은 없다. 독한 약을 쓰지 않고 적당히 붙이고 바르고 씻어 내면서 '시간이 약'이고 '잠이 보약'이라는 식으로 넘기는 걸, 아들 둘에 딸 하나, 세 아이 키우면서 10년 넘게 경험했다.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육안으로만 확인하면, 내가 의사라도 글쎄, '꽃가루가 요즘 좀 심하긴 하죠, 처방전 써 줄 테니 약국 가서 연고 아침 밤으로 두 번 잘 바르고, 항히스타민제 하루 한 알씩만 복용하세요.'라고 할 것 같다. 그나마 의사 선생님의 스탬프가 빵! 하니 선명하게 찍혀 있는 덕에 원가가 얼마인지는 모르나 두 약품을 단돈 2유로 65센트, 우리 돈으로 달랑 3,500원에 살 수 있다는 게 다행이고 감사이긴 하다. - 참고로, 스페인에선 처방 없이 약을 사면 가격이 상당하다.




연고를 지극정성으로 발라본다. 복어 몸뚱이 같은 눈두덩이 안과 밖에 치덕치덕. 바르고 나니 고름 같은 상아색의 연고에 타이머로 자동 분사되는 스프레이 마냥 눈물이 범벅되어 속눈썹은 세상에 이런 일이 에나 나올 법한 대환장 상거지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건 오직 하나, 일에 대한 걱정뿐이다.


'이거 얼른 나아야 다음 팀을 받아 일을 할 수가 있는데, 언제 나을 수 있을까?'

일에 대해서만큼은 프로인 한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아님 진짜 일의 경중을 모르는 띨띨이 꼰대라고 봐야 하나 모르겠다. 가족은 보자마자 놀랜다. 하긴, 이전에 밤늦게 호텔 앞에서 택시 기다리다가 폭행강도 당해서 머리털 쥐 뜯기고 이마에 상처도 난 적 있으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지 않음 이상한 일이다.

그때 손에 쥔 휴대폰은 뺏겼지만 지갑과 가방, 캐리어까지 모두 절대 사수하는 오기를 부리며 스스로 대견스러워했던 게 생각난다. ㅡ 그래, 3인조 녀석들 사이에서도 나는 살아남았어. 돈도 그대로고, 무엇보다도 해외 생활에 가장 중요한 신분증도 잘 지켜냈어. 조서 작성하러 경찰서에 가니 몰골을 보고 놀란 담당자가 일단 병원 가서 진단서부터 떼오라고 했지. 경찰 지시에 따라 몸 질질 끌어가며 병원 가서 진단받고, 결국 새벽 3시 넘어서야 조서 작성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서, 해외생활 산전수전 별 경험 다 겪어 보는구나 하며 긍정적 사고를 넘어 똘끼 충만한 데까지도 갔지.


그때는 그런 일이면 웬만한 건 다 겪은 거라 생각했다. 그러더니 코로나가 터져서 강제 2년 휴식에 들어가야 했다. 물론 코로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뭐 그러라지. 이 판국에도 살아남았는데 무슨 일인들 감당 못하겠나.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코로나 덕에 없던 배짱도 생겨났다. 별일이네, 정말.

그렇게 일을 시작했는데 전혀 상상도 못 한 사건이 다 생긴다. 눈에 보이는 인간 때문에, 또는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발생한 것도 아닌, 바이러스 마냥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꽃가루, 알레르기,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이 고생을 겪는다. 별일이다, 정말. 눈 아픈 게 이렇게까지, 굳이, 글로 쓸 일이었나. 글쎄, 쓰기 전까진 몰랐다. 하지만 글 쓰다 보니 눈 아픈 것도, 방해받는 시야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별나지도 않은 일이 별 일이 되는 건 글 덕분이다. 글 발행하고 눈 아프고 가려우면 또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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