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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26. 2022

이번엔 입이 난리다

가지가지한다 정말

얼마 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자고 일어났는데, 일어나 보니 말 그대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일이 있어 글로 남겼습니다.



일기장에나 쓸 법한 일을 브런치에 적자니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이유도 모른 채 너무 아파 억울한 마음마저 들어 그래도 그렇게 휘갈기듯 적고 나니 분풀이라도 하고 온 사람 마냥 마음이 한결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잊지 않고 챙겨 바른 약 덕분에 잘 나았습니다. 고운 자두 빛깔의 아이 섀도의 붓터치 흔적은 눈 녹듯 다 사라졌습니다.


한편, 부은 눈만 봤다가 정상인 걸 적응이 안 되더라는 아내의 말에 기분이 묘했습니다. 하긴 저부터도 잘못 맞은 보톡스 마냥 빵빵하게 부은 눈두덩이에 눌려 본래의 시각을 잃었다가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영역을 되찾는 눈동자의 힘을 보면서 제 눈이 맞나 싶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 곳곳을 다니며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는 게 업이라 그런지, 점점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눈을 보니 스페인의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으로부터 빼앗긴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자며 일어난 레콩키스타 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가 겹쳐지기도 했습니다. 네, 이 정도면 확실히 직업병 맞습니다.


일주일 남짓 눈 아파서 고생했다가 나으니 10년 전 라식 수술받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평생 흘릴 눈물과 콧물 다 흘릴 정도로 고생을 했지만, 이후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분이었거든요. (배경음악. 디즈니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




모든 문제는 절대 크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예외일 수 있겠지만요. 항상 작은 데서,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아니 이런 게 뭐나 된다고 그러냐 할 정도로 작디작은 데서 일은 발생합니다.


늘 먹는 삼시 세끼입니다. 식사량은 작지만 언제나 식사 후엔 후식을 먹습니다. 한국인답게 과일이 기본입니다만, 해외에 오래 살다 보니 군것질류의 후식도 좋아합니다. 젤리를 즐기지만, 이상하게 그날만큼은 초콜릿이 당겼습니다. 예전에 개인 가이드로 출장 다녀올 때 공항에서 산 두툼한 크기의 초콜릿 바가 있었지요. 여름이니까 냉장고에 넣어두었고요. 보통은 냉장고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까맣게 잊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가장 높은 선반에 두었기 때문에 아예 눈길조차 안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신기하게 계속 머릿속에서 초콜릿이 떠올랐어요. '당이 떨어졌다, 오버. 하지만 젤리는 안 된다. 다른 걸 찾아와라.' 머릿속에 이런 조종자라도 있는 거 마냥. 애들이 있을 때 먹으면 분명 달라고 조를 테니 없을 때 얼른 먹고 어떤 흔적도 남겨 놓지 않아야지만 무사히 보낼 수 있습니다.

특히, 간식 요정인 막내는 부엌에서 젤리 봉지의 뽀시락 거리는 소리(이 소리는 크게 납니다)나 콘 아이스크림 종이 껍질 뜯는 소리 (이건 제법 작지요) 등 뭐든 가리지 않고 소머즈급으로 반응합니다. 물론, 엄마가 요리할 때 쓰는 칼질 소리에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방이든 거실이든 밖에 있다가도 과자, 젤리, 사탕 등 비닐 껍데기 소리에만 기가 막힐 정도로 바로 "아빠, 뭐 드세요?" 하며 옵니다. 참고로, 제가 사는 스페인 집의 부엌은 미닫이 문이 있습니다.


냉장고 상단의 밀크 초콜릿을 꺼냈습니다. 알프스 산맥 그림이 은색으로 도톰하게 인쇄되어 있고, 멋들어지게 쓴 필기체의 로고로 포장된 종이 외피를 뜯고, 기분 좋게 바스락 거리는 은박지를 걷어 내면, 냄비 받침 두께 정도의 두툼한 초콜릿 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보관되어 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손바닥에 진득하게 묻지도 않습니다. 똑!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바 bar를 보니, 한 조각만 맛봐도 충전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은 이미 들떠있습니다.

아까 전부터 계속 자극해오던 전두엽의 명령이 드디어 mission complete 되는 순간입니다. 투가각! 쵸코렛 조각을 씹는데 아랫니가 윗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당시의 장면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겨 놓지 않아 결정적인 증거 자료 확보가 되지 않음이 아쉽습니다. 윗니가 아랫입술을 깨문 적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영어의 f, v 단어 발음하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랫니가 윗입술을 찝었다니. (집었다니가 철자상 맞지만 찝었다는 게 더 확실히 당시의 느낌을 전달해서 씁니다.) 초콜릿에 스테이플러 침이라도 넣었나 싶었어요. 살다가 별 일을 다 겪는구나 했습니다.


한 주 전만 해도 종잇장 같이 얇은 다크 쵸코렛을 먹으며 입안에서 파스슥 부서지는 느낌에 경쾌함마저 들었는데. 두께가 스테이크 급이 되고 나니 쵸코렛이 아니라 방금 담은 총각무라도 씹은 것만 같습니다. 아니, 총각무는 아삭 거리며 씹는 맛이라도 있지, 돌덩어리처럼 단단한 쵸코렛은 무엇에 비유해야 할지 찝힌 입술의 통증 때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찌릿하게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스위스 밀크 초콜릿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란 물 건너 가버렸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인데, 실수로 잠깐 찝힌 줄로만 알았던 그 자리에 구강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칫솔질하는데 따끔거립니다. 거울을 보니 펀칭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다 보니 구강염은 흔하게 생깁니다.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로 자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합니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 누적된 피로와 같은 뭔가 그럴싸한 외부적 요소가 아닌 먹다가 생기다니, 그것도 식사도 아닌 간식을, 심지어 쵸코렛... 당분간 전두엽에서 당 주문이 온다 하더라도 거부하렵니다.


나이가 들면 은은한 반백의 은발을 날리며, 눈가의 주름마저도 안성기 님처럼 중후함을 가지고, 적당히 과묵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맛을 즐기는 멋진 중년이 될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현실은 시트콤에나 나올 법한 일로 돌아가며 몸에서 난리를 피우고 까불거리는 어른 아이로 현실 감각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분명 책과 영화에서 감탄하며 보던 모습을 경험할 날이 오리라 믿어 봅니다.



photo by Gabriel Doti at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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