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후 가볍게 산책 나갔다 돌아오는 길. 입추가 지난밤 9시에도 여전히 밝은 스페인의 거리에서 바람이 시원스레 붑니다. 이번 주부터 한결 시원해진 저녁 공기를 즐기던 중, 바람은 나뭇잎만 건드리지 않고 묵혀 있던 제 마음도 살짝 스치고 지나갑니다: 심심한데 수염이나 밀어볼까?
샤워를 마치고 아들이 쓰고 놔둔 일회용 면도기를 집어 듭니다. 전에는 카투사 군 복무 때부터 사용한 질레트 면도기가 있었습니다. 십 년이 넘자 면도기 본체에 미끄럼 방지와 착용감을 위해 부착된 고무가 삭아서 떨어져 나갈 정도로 오래 썼지요.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 중 하나로 가족 중 어느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저만 사용하던 물건이라 애착이 있을 정도였어요. 어느 날 자리에서 없어진 걸 보고 처음엔 속상했지만, 좁은 집에서 어디다 딱히 모셔둘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니,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자며 애써 생각을 바꿨습니다.
저는 한국인치곤 수염이 잘 나는 편이었습니다. 콧수염 턱수염 구레나룻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골고루 나고 심지어 빨리 자라기까지 해서 사흘에 한번 정도 가위로 손질을 해줘야 했어요. 특히 콧수염은 손보지 않으면 밥 먹을 때 곤혹스러울 정도입니다. 아재냐 노숙자냐는 단 사흘 만에 뒤집어질 수 있어요. 머리카락도 그렇지만 수염 역시 워낙 빨리 자라는터라 학생 때 잔디인형 같다는 소리도 듣곤 했습니다.
해외에 나오자 수염 때문에 중국인보다는 일본인 아니냐는 얘기도 자주 들었고요. 실은, 중국인 일본인 둘 다 필요 없고 대체 난 언제 한국인이 되는 거니? 하는 자괴감만 덤으로 얻습니다.
종종 해외에 오래 살면 그렇게 수염이 나는 거냐 라는 질문도 들어요. 그냥 웃어 넘기기엔 상대가 자못 진지한 터라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을 듣고 서로 풉 하고 웃고 말았네요: 자기는 수염이 이방처럼 양 옆에만 나기 때문에 간신 같아 보인다고요.
심지어 이런 질문을 한 분들마다 대답이 다 같아요. 세상은 분명 넓은데 신기할 정도로 동일한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몸도 마르고 얼굴도 마르고 그 와중에 얼굴은 기다랗고, 그러다 보니 자연 뭉크의 <절규>나 영화 스크림을 떠오르게 하는 인상이 저는 콤플렉스였어요. (결론은 운동을 안 해서 그런 거니까 운동해서 살쪄라 하는 게 정해진 답이겠지만) 그래서 대안 아닌 대안이 수염을 기르는 거였습니다. 마침 여기 스페인에선 수염 기르는 게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일반적인 경우라 어색하거나 튀는 행동이 아니었어요.
슥슥. 전용 면도크림도 아닌 하얀 비누에 살짝 거품이 묻은 턱에서 촘촘하게 자리 잡은 턱수염이 면도기 날에 벌초하듯 베여 나갑니다. 부드러운 털이 잘리니 뻣뻣한 모가 고개를 내밉니다. 석석. 주걱으로 누룽지를 긁어내듯 몇 번이고 같은 부위를 면도기로 밉니다. 쏴아아. 샤워 물줄기에 수염으로 시커메진 면도날을 세척합니다. 일회용이라 해도 날카로운 날이기에 몇 년을 변함없이 지켜온 수염은 날이 가는 대로 밀리고 깎이고 잘립니다. 샤워실 수챗구멍으로 면도기에서 씻겨 나간 수염이 일개미처럼 줄지어 들어갑니다.
긴 생머리에서 단발과 커트 머리로 심경의 변화를 주는 여성처럼... 까지는 아니지만, 거울에 비친 검푸른기가 감도는 맨 얼굴의 사내를 보고 있으니 댁은 뉘신고 하는 질문이 절로 듭니다. 뜨뜻미지근 그러나 동시에 시원섭섭한 기분이 방금 블렌더에서 갈린 생과일 주스 마냥 마구 섞입니다. 익숙한 것과 뜬금없이 안녕을 고했으니까요. 눈앞에 지지부진하게 있다가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서 물귀신 마냥 저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지독한 자기 검열을 마침내 흘려보냈으니까요. 바닥에서 맴돌다 마침내 수챗구멍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걸 보니 시원하기까지 합니다.
가스 라이팅 당한 줄도 모르고 자아비판을 넘어 자기 비하로 '너는 그래도 싸!' 라는 독설로 스스로 선 넘으며 끝없이 몰아세우던 상처뿐인 옛 자아를 씻습니다. 찬물이 떨어지지만 몸 안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찬 줄도 모릅니다. 이 열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열정은 이미 식은 지 오래인데요. 의욕도 떨어져 무기력하게 달력 날짜 하루하루를 지우고 살뿐, 근육도 없이 마른 몸뚱이만 건사한 그 사내 더는 이전의 성실함도 꾸준함도 찾아보기 힘든데요. 대체 그 열은 어디서 올라오는 걸까요.
하루에도 수십 번 심란한 마음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며 스스로를 핍진하게 만들던 지긋지긋함을 진심을 다해 떨쳐냅니다. 질척거리는 진흙 수렁은 물론 끈적끈적한 폐기름 늪에서 빠져나가려 허우적거립니다. 이전처럼 끝도 없이 파내야 하던 갱도가 아닌 바늘구멍 같은 틈일지언정 이미 뚫려있는 터널이기에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 고문이 되는 일이 수 차례 있었지만, 그래도 붙잡아주는 이들이 있어 민망함을 무릅쓰고 기어올라옵니다. 몸 안의 열기는 다시 보니 그분들의 변함없는 격려이고 지지였습니다.
맨송맨송한 얼굴에 에센스를 바르고 손으로 두드리니 아직은 어색합니다. 물론 자고만 일어나도 곧 적응하겠죠. 하지만 수염은 또 금방 자랄 겁니다. 그럼 이전처럼 사흘 수염*이라며 관리하고 다듬겠지요. 그러니 수염을 밀고 깎고 자른 행위가 대단한 의미를 지닐 건 없습니다. 수염이 있어도 저이고, 없어도 저이니까요.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저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해 주는 당신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흘 수염 les barbes de trois jours, la barba de tres días
프랑스와 스페인의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수염 스타일링 중 하나로 전통적으로 긴 수염에 비해 1-3mm 정도의 길이로 전반적으로 산뜻하며 남성미에 운치를 더해 줍니다.
얼굴 얘기하다 보니 생각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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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사진: unsplash eldar nazar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