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는데 난데없이 글쓰기 소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합니다. 샤워헤드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긴장이 풀리자 글감 몇 개가 퍼덕이는 광어 마냥 솟구쳐 오릅니다. 횟감 아니 글감에 어울리는 싱싱한 제목도 따라옵니다. 제목에서 주제까지 뭘로 잡아야 하는지가 번뜩이며 지나가자, 아예 기승전결 일사천리로 글 한 접시가 맛깔나게 나옵니다.
5분도 안 되는 샤워 시간 속에 브런치 글 한 편이 머릿속에서 뚝딱 만들어지다니. 헐, 대박, 이게 남들이 말하는 지름신? 아니지, 코로나 시국에 버티기로만 몇 판 째 진행 중인데, 집안 말아먹을... 그래, 영감! 이런 게 영감인가 봐 하며 씻다 말고 주책맞은 영감이 됩니다. 그동안 글쓰기에 영 감 없다며 말장난, 아재 개그나 탐닉하던 아재는 이제 유레카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가 되어 연신 감탄합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글 한 편 남겨 모처럼 글쓰기의 쾌감을 맛보자며 냉큼 물기를 털고 말립니다. 방으로 가 막내의 지문 범벅 3년 차 10인치 노트북을 켭니다. 지름신 아마존 다음으로, 어쩌면 그 보다 더 신나는 일이지요. 얼른 비밀번호 입력해 웹페이지 열고 미리 즐겨찾기로 마련한 <브런치> 로고 버튼을 누릅니다.
응, 무슨 일이지? 머피의 법칙인 건가. 아니, 왜 꼭 이럴 때 갑작스레 와이파이를 못 잡아 난리래. 아냐, 그래도 괜찮아, 메모장에라도 적으면 돼. 메모패드 어디 있더라. 그래, 여기. 어, 그래, 아까 글감이 뭐였더라. 맞아, 피아노, 연습, 베토벤, 비창, 그러다 인생 엮어서 뭐, 이런 거였어. 그래서 뭘 주제로 뽑으려 했더라? 아니, 내가 좀 전 샤워할 때, 왜 그 있잖아... 헉!
물줄기와 함께 예고 없이 찾아온 영감은 헤어드라이어에 말라버린 한 줌의 머리털이 되어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해버렸습니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라더니만, 세상에 이게 글쓰기에까지 적용될 일인 건가요. 좀 전까지만 해도 영감 받았다며 실실 웃던 얼굴은 땡감 씹은 표정이 되었습니다.
텄구나 텄어. 그래 한 달 넘게, 거진 두 달가량 브런치 결석생으로 있던 네가 무슨 자격으로 바로 다시 글을 쓴다니, 나 원 참. 야, 옆집 마리아 할머니네 닥스훈트 세사르가 웃겠다. 혼자 들떠서 싱글벙글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이 충만했던 그 시간은 단 5분 만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유통기한이 이렇게 짧아서야 어데 쓰겠노 참말)
영감의 빈자리는 어느새 자조와 비난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네가 써? 감히? 그래 쓴다면, 뭘 쓸건대? 빤한 글 써서 뭐하게? 어차피 너 아니어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넘치고 넘쳤는데, 거기에 굳이 더 보태서 뭐에 쓰려고? 누구 보고 읽으라고? 읽을 가치는 있는 거야? 지식글이라면 이미 홍수지, 감성글도 소셜 미디어에 넘쳐난다. 그런데도 굳이 글을 써야 한다고? 누구 좋으라고? 야, 진짜 뻔뻔하다 너...
쓰나미로 대거 밀려드는 부정적인 생각에 글쓰기가 두려워지자 대신 작가님들 글마실이라도 다녀서 기분전환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헛, 그런데 아직도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됩니다. 공유기는 정상인데, 노트북이 문제인건지 알 길 없는 컴맹은 산만함 속에 하릴없이 왔다갔다만 합니다.
하여, 가는 날이 장날이 돼 애태우는 노트북 대신 4G 데이터 휴대폰으로 브런치 앱을 실행시킵니다. 그러자 블랙 앤 화이트, 투 톤의 심플함이 일품인 브런치에서 잠시 잠깐이긴 하지만, 익숙한 도입부를 보여줍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평소라면 그저 그렇구나 할 문장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눈과 마음으로 쏙 들어옵니다. 만약 저 문장이 You can "BE" anything by writing. 이라고 했다면 희망고문으로 그쳤을 겁니다. 왜냐하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심지어 된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든 된다, 모든 게 된다라고 하는 건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본인부터가 그 증거가 되니까요. (쓰면서 쥐구멍을 찾는 중입니다)
다행히, C.S. 루이스 작가는 우리에게 될 수 있다 하지 않고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된다는 건 정지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영문법에서는 Be 동사를 상태 동사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Be 동사 이외의 동사들은 모두 동작으로 봅니다. 즉, 만드는 건 움직이는 겁니다.
다시 말해, 글쓰기라는 건 완성이 된 '상태'라기보다, 생각에서 나오는 것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그렇지만 궁극에 가서는 모든 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언가를 심상에 떠올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글쓰기로 풀어 나가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작가 루이스의 문장에 이 한마디를 덧붙여 보면 어떨까요.
You can be something by thinking. &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