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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Feb 02. 2022

스페인에서 그리운 그대 목소리

한국을 나와 산지가 햇수로 16년 차에 접어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겨우 한번 바뀌었겠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선 한번 받고 더블, 아니, 트리플로 묻고 업데이트하고 가! 하려나.


마지막으로 인천 공항에 귀가 멍한 상태로 내려본 지 이미 5년 전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오래된 사람, 고인물지도 모를 일이다.


외국에서 보내는 명절은 명절이 아니다. 그냥 애들 학교 보내고, 출근하고, 장 보러 나가는 평일이다. 사실 자체만으로 대하기엔 안 그래도 추운 겨울이 더 냉랭하게 다가온다. 정정해야겠다.


외국에서의 명절은 추억의 환기이다. 아울러, 명절을 계기로 소중한 사람을 한번 더 찾는 그리움의 여정이다. 고독한 일상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일이다.


그런 추억의 길에 설과 추석이 있다. 추석은 '추석 잘 보내세요.' 인사 한번 정도로 간단히 주고받는다. 인사가 오가는 기간도 일주일 남짓으로 짧다.


새해는 연말부터 들어가니 두 해를 지나간다. 우리에겐 떠들썩한 연말 파티보다 차분한 연초 해맞이 광경이 보다 익숙하다. 


시작이 좋아야 한다. 일반적인 인사를 넘는 '복'을 빌어주는 인사로 말이 길어진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풍속이다. 덕담이라는 형식 아래에 좋은 말씀 소원도 담긴다. 성탄절의 뭉툭한 양말 대신 예쁜 복주머니에는 세뱃돈이라는 현금도 제법 준비해 둬야 한


양력 새해 인사는 보통 성탄과 같이 묻어간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다시 음력 새해에 또 한 번의 인사를 건넨다. 그러다 보니 두 번이 기본이라 귀찮아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안 그래도 바쁜데 한 달 가까이 거의 매일 끊임없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며 앵무새 인사를 주고받는  염증을 내는 분도 있다.


오가는 인사는 물론이거니와, 카톡 메시지, 이모티, TV 광고, 댓글과 답글까지 종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달고 사니 신물이 난단다. 좋은 말도 하루 이틀이지, 똑같은 말 반복되니 진심이 빠지고 그냥 카드 연하 장식의 인사 정도로 느끼는 듯하다.




나도 한국에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 지도 모르겠다. 뒤집어 말하면, 나와 있기에 그런 권태는 찾아오지 않다, 아직까지는. 오히려 나의 게으름 때문에, 평소에도 더딘 연락에 자주 못해 미안하고, 놓친 분들 죄송하고, 먼저 인사드리지 못한 분들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한편, 연말과 연초 인사를 놓쳤다 해도 불안하진 않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부지런히 인사를 드리며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굴러가진 않기 때문에 또 놓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설에는 ㄱ 에서부터 ㅁ 씨 성까지 인사를 드렸으니, 추석에는 ㅂ 부터 시작해야겠다. 이렇게까지 계산이 되지도 않거니와, 굳이 그렇게까지 메모할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다.


이미 바쁜 스케줄을 훈장으로 여기며 사는 세상이 된지도 오래인데, 최근 2년 간 코로나 시국에 바쁘다는 건 돈을 벌 일자리가 있다는 것과 동격이 되어 부러움마저 사게 되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까.




똑같은 문자를 계속 보낼 수도 없고 보내기도 싫다.


한 분 한 분이 전부 다른 의미로 연결되었고 찾아와 준 분들인데 '이 분이 저 분을 알리가 있겠어? 그냥 인사니까 그렇게 대강 보내고 말아.' 하며 단체방에 사진 한 장 올려 보내고 만다는 건, 몇 시간 프로그램을 돌려 다운로드하 파일이 원인 모를 일로 갑자기 끊어지는 바람에 다시 처음부터 돌려서 해야 하는 상황 보다도 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케이스다.


처음에는 문자 몇 건으로 인사를 드리지만, 이내 손목의 피로감에 전화로 간다. 시차 때문에, 그리고 바쁠 테니 열에 아홉은 연결이 잘 안 되리라는 걸 안다. 익히 겪어온 일이다. 그럼에도 전화를 걸어 상대방이 받기까지 기다리는 동안엔 생일날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이 마냥 한가득 설렘이 마음을 휘젓는다.


그건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상대의 따뜻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검은색 활자로 접할 때와 정겨이 담뿍 담겨 오색영롱함을 내뿜는 목소리로 건네받는 사이에는 범접 못할 차이가 있다.


물론 상대방이 시큰둥하게 받는다면야 나도 간단히 인사만 드리고 말지만 대개는 서로 얘기하다 보면 길어지게 마련이다.




대학생이 되기 전부터도 이미 전화기를 한번 붙들면 수다가 끝이 안 나는 통에 플래시 기능이 나오자마자 전화국에 신청해서 사용한 것도 순전히 나 때문이다. PC 통신을 쓰지도 않는 시대에 전화요금이 한 달에 5만 원 가까이 나온 것도 거의 전부 나 때문이다. 딱히 이성 친구도 없는 남학생이, 그냥 단순히 수다를 좋아하는 것만으론 설명되지 않을 일이다.


겉따속찌 랄까. 겉은 따인데 속은 찌질하기 까지 한,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학창 시절 내 모습이었다. 정작 상대 앞에서는 말 한마디 잘 못 건네는 숙맥인데, 전화할 때는 수화기 뒤로 여드름 투성이의 얼굴을 숨길 수 있어 떨림이 덜해서였을까.


아니면, 본래는 남자든 여자든 그저 친해지고만 싶은 마음이었고, 연애를 할 것도 아닌데, 무대공포증 마냥 심하게 콩닥대는 바람에, 답답한 속을 혼자서만 삭이다가 겨우 용기 내어 본 게 수화기를 잡는 것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을까.


어느 쪽이 되건, 또는 둘 다 아니건 간에, 진실은 누구도 모른다는 게 함정이다. 초, 중, 고 시절 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모든 건 30년 가까이 훌쩍 지난 어른이 되어 어설픈 기억 헤집어 멋대로 쓰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사람에 대한 애달플 정도의 그리움이다. 가족의 사랑을 잘 받아 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친구니 우정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끝없는 목마름이 있다.


감사한 일이다. 목마름이 있으니 계속해서 힘을 다해 우물을 파는 것일 테니. 끝없는 갈증이기에 그때만의 연으로 끝내지 않고 나와 그대의 목을 축일 을 함께 찾으러 떠나자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이 감도는 그대 올해 변함없이 복 많이 받기를 바란다. 그저 행복하고 좋기만 한 새해 happy new year, feliz año nuevo, bonne année 라며 깃털처럼 가볍기만 한 인사에 그치지 않아 감사하다. 


우리말 인사 속에 담긴 '복'을 지어 거리 시간뛰어넘어 그대에게 보낼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 따뜻한 목소리를 통해 수화기 너머 당신의 환한 얼굴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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